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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Apr 02. 2023

감수성은 풍부한데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

감수성은 풍부한데
타인에 대한 공감은 부족한 사람


그게 나다.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지나가며 보는 꽃, 나무, 사람들 하나하나 관찰하며 탄성을 내지르는 사람이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나? 그게 바로 나란 사람이다.


가장 처음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갔던 생애 첫 수학여행이다. 처음으로 집을 나와 조교, 교관이라는 사람들과 2박 3일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마지막날 밤, 커다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전교생이 둘러앉았다. 오, 분위기 좀 좋은데?


교관들은 하얀색 초와 종이컵을 나눠줬고 우리는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각자의 촛불을 소중히 지키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교관은 부모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우리를 낳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일을 하는 부모님들의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지 등에 대해 감격스러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저 멀리 있는 아이 한 명이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많아지고 커지더니 이내 목 놓아 엉엉 우는 아이들이 나온다. 어떤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벌써 저 멀리 있는 선생님께 뛰어가고 있다.


나는 멀뚱멀뚱 있었다. 아씨, 울어야 하나. 여기서 안 울면 우리 집이 행복하지 않은 집처럼 보이려나. 나만 사랑받지 못한 애처럼 보이려나. 눈물이 나와야 울지. 아 짜증 나네. 이런 생각 끝에 입으로 소리라도 내어 본다. 흑흑흑흑. 이래도 눈물이 나오지 않자 그냥 두 손으로 눈을 비빈다. 그래. 이 정도면 내가 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후에도 이런 경험은 계속 됐다. 애들은 슬프다는데 나는 슬프지 않았고, 애들은 재밌다는데 나는 재밌지 않았다. 어떤 아이에게 큰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담임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면 어떤 애들은 울고, 어떤 애들은 걱정하고, 어떤 애들은 화를 내기도 했는데 나는 그저 멍- 했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후에는 범죄심리를 다루는 TV프로그램이나 유튜브영상을 보며 어쩌면 내가 바로 이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싸패 정도의 비밀은 숨기려면 숨긴 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이상한 희망과 자신감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애인과 3년 넘게 함께 살며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님을 알게 됐다. 휴. 나도 남들과 같구나. 나한테도 공감능력이 있구나.


타인에게 공감하는 삶이라는 건 정말 따뜻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리는 앰뷸런스를 보면 좀 시끄럽다고 생각했었다. 앰뷸런스의 진로를 방해하는 막돼먹은 운전자들을 보며 분노할 때도 있었지만 그건 어떤 정당성이나 정의감 때문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저 앰뷸런스 안에 우리 애인이 누워있을 수 있다는 가정법 한 번만 굴리면, 지금 저 환자의 보호자가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지 쉽게 상상이 된다. 상상을 넘어 이 글을 쓰는 지금 벌써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심장이 아픈 느낌이 든다.


내 공감능력이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것인가? 없던 공감능력이 생긴 것일까? 씨앗처럼 작은 공감능력을 갖고 있었다면 어째서 이제야 커다란 느티나무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내뿜게 된 건가? 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혼자만의 미스터리였던 이 질문에 대해 최근 하나의 가설을 띄웠다.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의 보호자이고, 나를 낳고 키웠다지만 사실 크게 고맙지도 않았다. 왜 이 험한 세상에 나를 낳았냐며 원망하기 바빴다. 왜 우리 집은 가난한지, 왜 이 가난한 집에 동생을 둘이나 낳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랑이 뭔지 몰랐다. 당연한 걸까. 사랑을 받는 느낌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서른 넘어 애인의 사랑을 받아보면서 이제야 아, 이런 게 사랑이구나 배웠다. 그동안 내가 사랑받지 못했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가정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요즘 그런 가정을 만들고 있다. 나, 그리고 너. 나랑 애인이 나누는 대화가 훗날 우리 집의 문화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서로의 하루를 응원하고 작은 일도 함께 하고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말하고 듣는 삶. 그런 삶을 모두에게 보장하는 관계, 가정.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은 어릴 때의 나는 꿈꿔보지도 못했던 모습이다. 맛있는 걸 먹어봐야 그 맛이 또 생각날 수 있듯이, 천국이 있다는 걸 알아야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듯이 겪어보고 나서야 그런 가정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에게 출산, 또는 입양으로 아이가 생긴다면 지금 나와 나의 애인이 살고 있는 이 모습을 보여주며 함께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로 우리의 하루를 함께 열고 오늘도 고생했다고 멋지다고 내가 항상 네 편이 되겠다고 널 응원한다고 다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며 하루를 닫고 싶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님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본인들도 육아 전에는 이런 다짐을 했었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루를 살고 계신지 묻고 싶다. 내 글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역시 나겠지. 나중에 내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그때의 나도 지금처럼 멋진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


사랑이 사람을 키운다더니 아주 조금 성장한 느낌이다. 자그마한 성장이지만 어쩐지 눈앞의 풍경은 꽤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매거진 [탈가정 도망자들]은 앞으로 10주 동안 탈가정청년당사자모임 [탈탈탈]의 멤버 - 보라, 아린, 슈크림, 써니, 지선 - 이 쓴 글이 올라옵니다. 주제는 매주 돌아가면서 제안하고, 이번 글의 주제는 [내가 만들고 싶은 가정]였습니다.

※탈가정청년 : 원가족과 이별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청년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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