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족이 없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다시 한번 실감 난다. 같이 사는 애인이 있고, 그 사람과 나는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그 가족 말고 원가족이 없다. 나한테는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다. 아니, 원래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 가족이 없는 사람의 결혼,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까.
애인과 결혼을 생각하면 머리가 좀 복잡해진다. 당장 애인의 가족들에겐 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부모님이 원래 없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잘 살고 계신데 나랑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추가적인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직장동료가 아이디어를 줬다. "제가 가족과는 왕래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도로 얘기하는 방향으로. 내 생각에는 "제가 가족과 헤어졌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차이점을 잘 모르겠지만 알고 지내는 어른 몇 분께 이 두 가지를 말씀드려 봤더니 왕래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인 것 같다고 해주셨다. 하긴. 내가 어떻게 설명해도 애인의 부모님들은 내가 어떤 일을 겪어서 부모와 헤어지게 됐는지 궁금하시겠지 아무래도. 심한 가정폭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것도 아닌데 내 선택을 이해해 주실까. 솔직히 두렵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상견례라는 과정을 거쳐야겠지? 내가 애인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린 뒤에 우리 둘이 얘기하면서 결혼날짜를 잡고 식장을 잡으면 되는 걸까.
결혼식장은 애인이 사는 동네로 잡아야 하려나. 애인 부모님과 지인이 많이 오실 테니까. 내 지인들이 걱정되긴 한다. 가족이 아니라 친구와 지인일 텐데 멀리 전라도 광주까지 와 주실 분이 계실까. 친한 친구 10명 정도 함께하며 그냥 텅 비워놓고 결혼식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결혼식 끝나고 사진 찍을 때는 어쩌지. 신랑 쪽 가족 나오라고 하면 엄청 많을 텐데, 신부 측 가족 나오라고 하면 아무도 없겠네.
혼주라고 부르던가. 신랑신부의 부모님이 앉는 자리를 마련해야 하나. 마련하면 우리 부모님 자리는 텅 빌 텐데. 너무 감사하게도 소장님 부부께서 앉아주신다고 하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소장님 부부가 아니라 나를 많이 도와주신 우리 소장님, 그리고 안산의 희성님 같은 분이 앉아 주시면 안 되나. 아 각자 배우자가 있는데 그렇게 앉기도 좀 불편하실 수도 있겠다.
결혼식 전에 신랑신부 어머님들이 나와서 화촉을 밝히던데 그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도 소장님이 해주시는 게 맞나. 아니 소장님이 아직 아들 결혼식도 없었는데 첫 혼주석 경험을 나한테 주신다는 것도 참 슬프다. 대체 왜 결혼식에 혼주가 있어야 하는 걸까. 우리 결혼식의 주인공은 나랑 우리 애인이면 좋겠는데.
이런 고민을 할 바에야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사는 게 나은 건 아닐까. 그렇지만 애인의 집에서는 첫 번째로 결혼하는 사람이 애인이다 보니 결혼식이 없으면 크게 서운하실 것 같다.
사실 이 모든 건 꿈이다. 결혼식 치를 돈도 없다. 스몰웨딩이라는 걸 해도 좋겠지만 그러려면 장소는 공짜로 사용이 가능해야 꿈을 꿔볼 수 있을 것 같다. 공장 같은 곳도 좋고, 시골집 같은 곳도 좋으니 나 다운 곳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공간이 없다. 이효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스몰웨딩이 더 비싸다고.
결혼식이 이런 모습이 된 건 무엇 때문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식을 생략하거나 미루기도 하던데. 어떤 사람들은 정형화된 결혼식이 제일 저렴한 법이라며 여차저차 치르기도 하던데.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그냥 고민으로 남겨둔 내 모습이 좀 답답하다.
만약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하고 싶은 결혼식은 있다. 교통과 주차가 편한 서울, 잔디밭이 깔린 야외 예식장에서 드레스 대여 없이 내가 산 원피스를 입고 결혼하는 것. 애인도 예복 빌리지 않고 본인 정장에 보타이 멋지게 하고. 사진작가는 지인 중에 부탁하고 싶고 영상으로 하객들의 메시지를 받고 싶다. 그리고 하객들한테 축의금 안 받고 밥을 쏘고 싶다. 가족이 있던 시간부터 가족이 없어진 지금까지 내 곁에서 한 자리씩 꿰차고 살아준 지인과 친구들,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의미에서 정찬을 대접하고 싶다. 물론 고맙다는 의미라면 결혼식이 아니라 무슨 식이든 가능하겠지만 글쎄, 잘 사는 모습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인가. 저 잘 살고 있으니까 안심하시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 그동안 여러분이 보내주신 관심과 응원이 제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고. 덕분에 제가 결혼이라는 걸 한다고.
물론 애인이랑 둘이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별로 상관은 없다. 혼인신고 안 하고 살아도 되고, 혼인신고만 하고 살아도 된다. 둘이 계속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형식은 상관없다. 다만 우리 둘이 같이 살려면 집이 필요하고, 임대주택을 들어가려고 해도 혼인신고증명서를 요구하는 게 현실이니까 결혼을 고민하게 됐을 뿐이다. 애인에게 결혼식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결혼식 해보게 해주고 싶어. 비싸고 좋은 건 못해도 그냥 남들처럼 다른 사람들 축하받으면서 신랑입장 하게 해주고 싶어. 스물아홉 살 꼬마신랑이 내 마음을 알까. 한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
매거진 [탈가정 도망자들]은 앞으로 10주 동안 탈가정청년당사자모임 [탈탈탈]의 멤버 - 보라, 아린, 슈크림, 써니, 지선 - 이 쓴 글이 올라옵니다. 주제는 매주 돌아가면서 제안하고, 이번 글의 주제는 [탈가정이 내 삶의 빅 이벤트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탈가정청년 : 원가족과 이별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청년들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