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랑 인연을 끊었다. 부모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 천륜이라면서 끊을 수 없다고들 말한다. 과연 그럴까.
누가 말하느냐,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보통 '부모와 이별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표현을 쓸 때마다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아직 어쩔 수 없다.
부모와 연을 끊은 사람에 대해 분명 어떤 이미지나 낙인이 존재할 것 같은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현실에서 낙인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다. 내 주변 사람들은 탈가정 상황에 대해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그렇구나, 힘들진 않아?'라고 물어봐주는 편이었다. 다들 좋은 사람이다. 다만 가끔 이런 말을 듣긴 한다.
잠깐 그럴 수 있지.
탈가정은 영원하지 않다. 결혼도 이혼도 영원하지 않듯이. 탈가정은 결과가 아니다. 시작이고 과정이고 상태이며 현상이다.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일상에 여러 일이 일어나듯 탈가정한 사람의 일상에도 여러 일이 일어난다. 이 일들은 계속 생성된다. 해결해도 또 생성되니 끝이 없다. 그래서 탈가정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고 과정이며 상태인 것이다. 그건 탈가정 당사자 본인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그럴 수 있다는 말은 좀 불쾌하다. 예를 들어 이제 갓 결혼한 사람에게 '결혼이 영원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존중한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 탈가정선언은 잠깐 떨어져 있자는 별거선언이 아니라 평생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부모님한테 서운한 게 많았나 보네.
겨우 서운해서 부모와 연을 끊은 사람도 있을까. 별거 아닌 일로 부모님한테 왜 불효하냐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신지. 이 말인즉슨 그러니까 꼬장 다 부렸으면 이쯤 하고 다시 부모님께 돌아가라는 말인가. 꼬아 듣는 거 아니냐고 물어도 답할 생각 없다. 부모와 연을 끊는 게 쉬운 사람이 있을까. 왜 나는 그저 서운함 같은 감정으로 부모와 연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한 번이라도 들어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 건지. 아니, 상상이라도 한 번 해보셨는지?
부와 명예를 욕망하듯 탈가정을 욕망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탈가정을 원한 적 없었다. 내게 주어진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나와의 관계를 잘 만들었다면 나도 버텼을 것이다. 관계가 시원치 않더라도 부모의 존재 자체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면 탈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사과하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고, 변화하지 않았다. 20년을 버텼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게 부모를 탓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겠나. 탈가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는걸.
아이 낳으면 다시 연락하게 될걸.
탈가정을 결심하게 된 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 평생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였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나의 부모님께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대하듯 내 아이를 대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30년 동안 했던 말들을 내 아이에게 수 십 년 동안 말할 거라고 생각하면 너무 싫고 소름이 끼쳤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서른몇 살까지 20년 넘게 탈가정을 생각했다. 그동안 수많은 영화, 드라마에서 가족과의 불화를 견디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들을 봤다. 부모에게 맞으면서 살며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청소년, 학교폭력을 당하는 자녀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돈 벌 궁리를 일삼는 부모를 둔 청소년, 다른 형제자매와 대놓고 차별하는 부모를 둔 청소년,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는 도구로 공부만을 강요하는 부모를 둔 청소년, 유산 상속의 수단으로 자녀를 대하는 부모를 둔 재벌집 청소년까지 대중매체 속에서 탈가정을 시도하거나 성공한 청소년이 있었던가.
왜 매체 속 청소년들은 결국 부모와의 연을 유지하는 걸까. 가족이 붕괴되면 사회도, 국가도 붕괴될 거라는 우려 때문인가. 천륜을 끊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청소년을 매체에서 묘사하면 청소년들이 마구마구 탈가정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걸까. 하긴 아직도 매체가 성소수자를 다루면 아이들이 성소수자가 된다고 믿는 세상이 아니던가? 이상한 연결고리가 언제쯤 다 끊어질까.
부모만 자식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식도 부모를 버릴 수 있다. 이 사실은 굉장히 엄격하고 무서운 것이다. 탈가정은 현실세계에 존재하고 있으며,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은 탈가정한 존재들이 아닐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더 귀히 여기고 존중하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에 목매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면 좋겠다. 탈가정청년모임 당사자인 우리들처럼! 우리 얘기를 포함해서 더 많은 탈가정청소년, 청년들의 얘기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래도 20년 동안 지켜보니 가끔 탈가정 연예인에 대해 기사가 나오더라. 지금도 그들이 탈가정 상태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이 사람들을 응원한다. 부모 없이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는 기대는 무례할까.
다만 탈가정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입장문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어서 많이 아쉽다. '천륜을 끊지는 못하지만'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다던지,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정도로 느슨하게 표현한다던지 하는 점 말이다. '부모와 연을 끊었다'라고 말하는 첫 번째 연예인은 누가 될까?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