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등본열람제한
이제는 가족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싶지 않다. 모든 가족의 연락을 차단했지만 여전히 내 주소를 알고 있다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주민등록열람제한"이라는 걸 신청했다. 다시는 나를 찾지 않길 바랐다.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았는데 거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적혀있었다. [사망] 두 글자. 성차별과 남아선호를 당연시 여기던 어떤 긴 시대가 드디어 우리 집에서는 저물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제 끝났나?
언제였지, 동생은 여전히 내 상태를 모르는 건지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연락을 주었다. 할머니는 평생 딸과 아들을 차별했다. 나한테도 용돈을 주셨고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지만 글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토피 때문에 엄마도 나도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걸 엄마한테 들었다. 밤새 가려워서 잠 못 들고 엉엉 우는 나를 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서 쩔쩔매다가 병원을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께서는 뭐 그런 일로 병원에 가냐고 하셨던가. 그래서 내 몸에 흉터가 남았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몇 번씩이나 들었다.
엄마는 항상 할머니 때문에 힘들었다. 아빠는 사고를 쳐서 가진 돈을 다 날리고, 빚쟁이가 집에 찾아오고, 공무원 직장을 엄마와 상의 없이 그만두었다. 갓난쟁이가 있음에도 사업을 한다며 몇 년 동안 생활비를 한 푼도 갖다 주지 않았던 위인이 아빠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못 받았던 건지 엄마가 받고 싶었던 어떤 것보다 적게 받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을 쓰신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엄마는 새벽에 수레를 끌고 우유배달을 나갔다. 당시에는 전동수레 같은 건 발명되지도 않았을 옛날이라 아빠도 같이 나가야 무거운 우유수레를 둘이서 끌 수 있었는데 아빠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와서는 뻗어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엄마는 엉엉 울면서 아빠를 흔들어 깨우고, 얼굴에 물을 붓고, 뺨을 때려도 봤지만 아빠는 전혀 일어나질 않았고 결국 또 엄마는 엉엉 울면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여기저기 부딪혀서 멍들고 피 흘리며 배달을 해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엄마가 우유배달을 하게 된 건 아무도 아이들을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랑 둘째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할 수 있는 일로 우유배달을 하게 됐다고 드었다. 원래 엄마에겐 직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결혼하면 여자들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기에 엄마도 그만두었다. 다시 일을 하고자 했으나 아이들 때문에 어려웠다. 엄마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기 때문에 먼 땅까지 와서 손주들을 돌봐주실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방학 때마다 엄마의 부모님께 맡겨졌다. 아빠의 부모님은 우리를 돌봐주지 않으셨다. 이유는 잘 모른다. 엄마는 많이 외롭고 힘들어했다.
엄마는 종종 할머니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첫째 딸인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라 했다. 첫째가 딸로 태어난 뒤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엄마는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나를 임신했을 때와 너무 많이 달라서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낳았다고. 당시에는 남아선호사상이 너무 심각해서 병원에서 성별에 대해 힌트를 주는 것만으로도 불법인 세상이었다. 아들일 거라 철석같이 믿고 낳은 둘째는 또 딸이었다. 할머니는 또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가셨고, 이후 둘째 딸은 남자한복을 입고 돌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래야 셋째는 아들이 나온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셋째를 낳았을 때 처음으로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셨다. 아마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할머니께 여쭤본 적은 없다. 셋째는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첫째인 나와 8살, 둘째인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아들은 너무나도 하얗고 예쁘게 태어났다. 순둥순둥한 성격에 갈색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 모든 것이 너무 예뻤다. 내 눈에도, 마을사람들 눈에도 예뻤으니 엄마랑 할머니 눈에는 얼마나 예뻤을까.
사실 흐릿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둘째와 셋째 사이에 엄마가 임신했었다. 엄마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지만 엄마의 마른 몸에서 자꾸 커지는 엄마 배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는 없어졌다. 유산인지 임신중단인지, 아니면 임신했던 기억 자체가 잘못된 기억인지 여전히 모른다. 내 기억이 잘못 됐을 수도 있고 나도 그러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오랫동안 둘째와 셋째 사이에 누군가 있었다고, 할머니 때문에 그 아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걸.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면서 미역국을 끓여 드시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나기도 하고. 그래서 셋째 동생을 가졌을 때 엄마가 우리한테 임신했다는 말을 안 해줬나 싶기도 하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와 차별당하는 건 어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저 아리송한 느낌이었다. 이게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뒤 차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이건 신분이구나, 그리고 배신이구나! 할머니가 몰래 동생을 데리고 방에 들어갈 때마다 사실은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역겨웠다고 해야 하나. 파트너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느낌이라고 설명해도 될 정도의 격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겨우 한숨이었다. 하, 또 쟤만 용돈 주시는구나. 또 쟤것만 사 오셨구나. 나는 착하고 따뜻하고 똑똑한 큰 누나였으니까.
아들은 동네에서 유명한 미남으로 자라났다. 당시 '유승준 머리'로 통하던 스타일을 너무 잘 소화했다. 하얗고 뽀얀 순둥이. 나는 동생을 끔찍이 예뻐했다. 매일 안아주고 업어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날 태어난 아이였으니 나이차이가 정말 많이 났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이.
슬프게도 이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의 누나들이 어떤 슬픔 속에서 너를 기다렸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뇌가 순수한 아이로 자랐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키가 커졌고 늘씬해졌다. 키 185라는 근육질 남동생은 여전히 누나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머리가 어질 했다. 누나들의 희생은 당연시하는 태도는 자기가 만나는 여자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기가 너무 싫었다. 겨우 이런 사람이 되는 게 너의 전부니? 한심하고 안쓰러웠다.
할머니는 꾸준히 아들을 예뻐하셨다. 명절에는 남동생의 선물만 사 오곤 하셨다. 큰 집에도 노력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처럼 딸 둘이던 큰 집에 결국 아들이 태어났다. 내 동생보다 한 살 적었고 그 집 큰 누나와는 10살 차이가 났다. 그 집 아들과 우리 집 아들은 쌍으로 묶여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선물과 용돈과 대접을 받았다.
명절과 차례에 인사를 올리는 건 아들 둘의 몫이라고 했다. 딸들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만 절을 올릴 수 있었다. 나중에는 좀 바뀌어서 딸들도 잔을 올리게 하셨지만 초기엔 얄짤 없었다. 아들들은 내가 왜 차례나 제사를 배워야 되냐며 서럽게 울었지만 너희가 장손이기에 배워야 한다고 호되게 혼내셨다. 남동생은 억울하다며 엉엉 울었다. 저들이 장손인가? 내 옆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있는 우리 큰 언니를 두고 왜 10년이나 늦게 태어난 저들이 장손이라며 대우를 받는가? 심지어 쟤네는 저게 대우라는 것도 모르는데? 마음속에 열불이 일렁거렸다. 할아버지! 왜 쟤네가 장손이에요? 언니랑 저는요? 물어봐봤자 하하하하하하하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차례, 제사가 끝나면 큰 집 거실에는 두 개의 상이 펼쳐졌다. 하나는 큰 상, 다른 하나는 작은 상. 큰 상에는 어른들과 남자들이 앉아 벌써 식사를 시작했다. 며느리들과 딸들은 뒤늦게 작은 상에 둘러앉는다. 큰 상에서 식사하시던 분들이 뭔가를 찾는다. "물" "여기 갈비 떨어졌다." "뼈 담을 그릇 가져와라." "여보, 나 밥 조그만 더 줘." 큰 엄마는 계속 일어나신다. 물, 갈비, 밥, 뼈그릇, 국, 물,... 큰 상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작은 상에 있는 사람들은 두더지 게임 속 두더지처럼 계속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한다. 둘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가 일어나려는 어떤 타이밍에 큰 엄마가 막는다. "동서, 식사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엄마와 큰 엄마의 몫이었지만 우리가 커버리고 나니 우리도 두더지가 되었다. 우리 집 아들은 여전히 앉아서 "국 더 먹어도 돼요?" 같은 말을 뱉고 있다. 나도 큰 상에 앉아보기도 하고, '밥 더 주세요' 같은 말을 해 보기도 했지만 하나도 시원하지 않더라. 그다음부터는 큰 상에 있는 반찬은 모두 작은 상에 놓겠다는 다짐으로 반찬을 사수했다. 혹은 그냥 큰 상에 있는 아들 자리에 턱 앉아 버리기도 했다. 비키라고 해서 쫓겨나긴 했지만.
명절마다 음식을 해야 하는 게 지긋지긋했다. 이 글을 만약 우리 큰 언니가 본다면 황당해할 것이다. 네가 뭘 했다고? 정말 맞다. 언니한테 너무 미안하게도 난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언니는 명절을 앞두고 일주일 전부터 명절을 준비했다. 할머니와 큰 엄마를 도와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간을 봤다. 우리 집은 뒤늦게 도착해서 만두나 송편을 빚고 전을 부쳤는데 그 두세 시간도 나는 너무 싫었다. 매번 도망간 나를 두고 결국 언니, 큰 엄마, 우리 엄마까지 셋이서 다 해내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듯 남자들은 옆에서 술을 드시고, 아들들은 피시방에 게임을 하러 가고 없다.
엄마는 큰 집에서 명절을 보내고 오면 꼭 병이 났다. 감기가 걸리거나 체하기 일쑤였는데 마음이 불편해서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그 집은 너무 추웠고 우리 집은 너무 따뜻했다는 것만 안다. 추운 집에서 엄마가 고생이 많으셨다.
서울 토박이 할머니는 북한에서 내려온 남자를 만나 자녀 셋을 낳았다. 남자는 이미 북한에서 가정을 꾸린 바 있었으나 할머니는 괜찮다고 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셨다. 그중 둘이 아들이었는데 만족하지 못하셨던 걸까? 며느리들에게도 아들을 강요했던 이유가 뭘까? 나도 낳았으니 너희도 낳아야 한다는 대물림이었을까?
그 자랑스러운 아들 중 둘째 아들인 우리 아빠를 보시라. 와이프와 갓난쟁이를 나 몰라라 외면하고 직장을 때려지고, 가진 돈 다 날리고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바깥에선 투철한 봉사정신과 젠틀함으로 유명한 아빠가 집에선 증조할머니를 밀치고, 엄마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할머니, 그 아들이 할머니한테 해준 게 뭔데요?
할머니가 좋을 때도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많이 난다. 아무리 미워도 돌아가시기 전에 뵙고 싶었는데 엄마 아빠 보는 게 싫어서 할머니를 보러 가지 않았다. 아빠랑 남동생을 그렇게 키워낸 할머니를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할머니는 다정한 분이셨다. 그놈의 아들이 뭔지, 왜 나는 할머니와 더 가까워질 수 없는지 분통 터질 때가 많았다. 아들 없어도 집 안 망해요 할머니. 할머니는 나한테 관심이 있으셨을까, 없으셨을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할머니, 아이들 마음 얻는 게 얼마나 쉬운 줄 아세요? 저는 여전히 할머니가 저 낮잠 잘 때 덮어주시던 이불이 얼마나 보드랍고 따뜻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요. 저 약과 좋아한다고 시장에서 약과 사다 주시던 거, 두부 좋아한다고 두부 쌓아서 저한테 주시던 거, 저는 그런 것만으로도 저는 할머니가 좋았어요. 겨우 그런 걸로도 할머니가 좋았어요. 가시는 길, 배웅 못 나가서 죄송해요. 가신 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거기서는 아들만 찾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안녕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