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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ul 10. 2023

아이큐는 높지만 가난한 사람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요즘 ADHD, 수면, 불안, 우울 복잡한 문제로 심리상담, 심리검사, 정신과진료를 받고 있는데 얼마 전 심리검사 결과를 받았다. 심리검사에는 아이큐 검사도 포함되어 있어서 본의 아니게 아이큐를 알게 됐다. 아이큐가 뭘까. 두뇌를 얼마나 잘 쓰는지 같은 능력인가. 언어, 공간지각, 작업기억 뭐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공간지각이 많이 높았다. 전체 아이큐가 높아봤자 멘사 가입할 수준으로 높은 건 아니고 90~110이 평균적이라는데 거기서 두어 단계 벗어난 우수함이라고 한다. 내가 우수하다고?


아이큐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다행이다'였다. 요즘 내 머리가 진짜 안 좋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전문가가 말씀해 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 자꾸만 뭔가 깜빡하게 되고, 뭘 하다가 곧 잊어버리고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했다. 덧셈 뺄셈 같은 연산이 잘 안 된 건 너무 오래되어서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사서 풀어보다가 연초에 ADHD 검사를 받아 본 것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좀 불쌍하다'였다. 머리가 좋은 것에 비해 너무 방황하며 살았던 게 아닌가. 직장도 여러 번 바꾸고, 분야도 바꾸면서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회초년생인 양 여전히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심지어 또 일을 그만두고 다시 백수가 된 내가 뭔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똑똑한데도 가난했구나? 좋은 머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이라고 해야 할까. 


불쌍한 이유는 또 있다. 이 좋은 머리를 갖고도 스스로에게 예쁨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조금 더 예뻐해 줄걸. 어여삐 여길걸. 그러고 나니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던 나를 알아봐 주고 인정해 줬던 주변 사람들의 존재가 생각나 감사한 마음도 든다. 나조차도 나를 아끼고 존중하지 않았는데 그런 나를 알아봐주고 돌봐줘서 감사해요.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나란 인간은 왜 또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물이 절반만 채워진 컵을 보며 누군가는 물이 반이나 들었다고 말한다는데 왜 나는 여전히 물이 반밖에 없다며 한탄하는지!


이번 심리검사를 통해 나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게 됐다. 생각이 급하게 돌아가는 면이 있어서, 내 입맛에 맞는 특정 정보만 있으면 정보를 더 분석하기보다는 있는 정보를 갖고 마음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이런 부분을 '직관'이라고 생각하고 장점으로 여길 때가 많았다. 앞으로는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할 수 있도록 유의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물론 생각의 습관을 변화시킨 다는 게 다짐만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늘 아이디어가 많은 편이다. 아이디어에 시달린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상상이 늘 일상을 침범한다.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부지런함이 없어서 남는 건 딱히 없다는 게 흠이다. 언어이해와 공간지각이 뛰어나면 추상적인 개념을 공간적으로 회전시키면서 사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개념을 이해하고, 여러 개념들 간 다양한 연결을 시킬 수 있단다. 그런 걸 사람들은 '아이디어', '기획'이라고 부른다고. 그래, 내가 아이디어 좋다는 말은 많이 듣고 살았지. 공모전도 아이디어 공모전이면 수상하더라.


아이디어를 발화하는, 시작하는 추진력은 좀 있는 편인데 마무리가 항상 뒤숭숭했다. ADHD 성향이기도 하지만 지능검사에서도 같은 얘기가 나왔다. 이게 요즘 내 고민과 딱 닿아있는 영역이다. 실행력이 너무 없는 부분. 심리검사를 해 주신 임상심리사 선생님께서는 실행까지 모든 일을 나 혼자 다 할 필요는 없다고, 기획을 주로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씀을 해주셨다. 글쎄요. 기획이요?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른다. 기획으로 어떻게 돈을 벌죠?


요즘 내가 기획하고 싶은 게 있긴 하다. 첫 번째는 친구가 하고 있는 즉흥극을 널리 널리 홍보하는 문화기획이다. 청중의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즉흥극으로 표현해 주는 플레이백시어터라는 장르인데 너무 좋더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연에 참여할 수 있길 바라면서 고민을 해보게 됐다. 두 번째는 에일리 세계관 기획.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고 하면 방탄소년단과 에일리인데 방대한 방탄소년단의 세계관에 비해 에일리의 세계관은 너무 뭐가 없더라. 에일리라는 사람의 히스토리와 성향, 방향성을 담은 세계관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렇게 쓰다 보니 어디까지가 기획이고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모르겠다. 요즘 쓰고 있는 그림책이 있는데 이것도 표현은 '쓴다'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림책을 기획하고 있는 건가. 드라마도 그래. 너무 쓰고 싶지만 쓰는 건 너무 어렵다.


아이큐가 높다는 게 별것인가 싶다가도 괜스레 의미부여를 해본다. 아이큐가 높다잖아. 혹시 알아? 앞으로 내 인생이 성공하게 될지. 아직 성공 가능성이 열려 있을지도 몰라! 아직은 포기하지 말아 보자. 그래도 머리는 좋다고 하니까. 다른 걸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 조금 더 나를 인정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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