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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an 15. 2023

비밀을 품었다. 조울증이라는

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나를 옭아맨다고 느꼈던 부모 가족 친지와 인연을 끊었고, 힘들었던 경험을 글로 팟캐스트로 유튜브로 내보내며 드디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조울증 진단을 받은 지금은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허무해졌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고 소용이 있을까. 내가 조울증이라는데.


요즘은 정신과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정신건강의학과라는 말을 쓴다. 정신과라는 단어에 대한 고정관념이 병원과의 심리적 거리를 넓혀서 진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신분열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조현병이라고 쓴다. 타인이 보기에 증상이 심각한 정도일지언정 그 증상들이 약으로 꽤 잘 조율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조울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양극성장애라는 말을 쓴다. 근데 그 이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단어 모두 내 일이 되기엔 너무 충격적인 단어다.


나는 ADHD도 있다는데 그게 조울증으로 인한 것인지, 독립적인? ADHD인지는 앞으로 진료와 복약을 통해 밝혀 볼 예정이다.


ADHD는 그냥 말할 수 있었다. "저 ADHD래요. 어렸을 때부터 그러긴 했는데 이제야 진단을 받았어요." 그럼 사람들은 말한다. "어머 그래요? 사실은 저도 ADHD 같아요. ADHD는 증상이 너무 대중적이라. 통계에 따르면 100명 중 30-40명이 겪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ADHD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이 정도 대화는 소화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조울증은 말할 수가 없다. "저 조울증이래요. 그래서 ADHD증상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해요." "그래요? 어머 어떡해요."...


내가 ADHD일거란 가설은 1년 넘게 갖고 있었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하며 진단비 30만 원을 감행해서라도 진실을 가려보고자 용기를 냈다. 이 병원은 아이패드로 심리검사를 10가지 넘게 내주셨다. 그중 조울증 가려내는 질문이 있었는데 고민할 여지가 없이 모든 증상이 체크, 체크, 체크됐다. 에이~ 설마 내가 조울증이겠어? 이런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거 다 옛날이잖아. 요즘은 이러지 않지 않나?


나중에 알았는데 조울증에는 타입이 2가지가 있다. 1형은 조증 삽화가 좀 격렬한 타입이고, 2형은 경조증삽화라고 해서 조증처럼 격렬하지는 않은 어떤 것을 경험하는 좀 덜 격렬한 타입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1형의 조증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한 경우에는 1형으로 진단이 내려진다고 한다. 나는 아마 1형이다.


혼란스럽다. 내가 조울증환자라니? 여보세요. 의사선상님. 제가 조울증환자로 보이세요?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 아 이 생각도 조증삽화인가 의심한다.


1년이 넘은 가설을 갑자기 증명해 볼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요즘 내가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며 농담으로 승화해 본다. "나 요즘 인지능력이 좀 떨어진 것 같아. 만 35세, 노화의 시작인가? ㅋㅋㅋ" "뭐야~ 왜 이래~~ 깔깔깔" 조울증을 방치하면 인지능력이 떨어질 수 있단다. 그래서 조울증은 방치하면 안 되는 병이란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니 아직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이런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게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주말 오후, 덜컹거리는 지하철 4호선에서 이 글을 쓰며 다른 사람들을 본다. "내가 앞으로 여기 이 사람들처럼 계속 현실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러다 이내 다그친다. "그게 무슨 불손한 생각이야? 살아가야지! 지금까지 이 상태로 살아온 네가 참 대단하지 않아? 조울증이었다잖아! ADHD였다잖아! 정신 안 차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3년 전에 정신과에서 불안을 진단받았을 때, 더 많은 심리검사를 받았어야 했나? 그렇지만 그땐 검사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그럼 그때 약을 맘대로 끊지 말았어야 했나? 그럴지도.


진단받은 지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나랑 세상의 거리가 지구-달만큼은 멀어진 것 같다. 이제 진단을 받았으니 치료하면 된다고 나한테 긍정적으로 말해주고 싶은데 잘되지 않는다. 당분간 꽤 헤매게 될 것 같다. 헤맬 땐 헤매더라도 글은 남겨야 한다는 절박함에 부지런히 글을 남긴다.


하지만 이 글을 보는 누구도 나한테 조울증 얘길 꺼내지는 않으면 좋겠다. 아직 대화할 준비가 안 됐다.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오히려 내가 먼저 꺼낼지도 모르겠다. 뭐부터 정리를 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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