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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Dec 13. 2019

불안, 우울

[정신과 방문기] 방문 준비부터 1회 차까지

그래! 병원에 가보자! 여차저차 결심은 했는데 그다음을 모르겠더라. 다음 스텝을 잘 모르니 방황할 여유가 생기더라. '그냥 병원은 가지 말까? 햇빛 보면서 운동하면 괜찮아지는 거 아니야?' 이런 여유. 우울증은 병이고 혼자의 힘으로는 완전히 괜찮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틈만 나면 병원을 가기 싫어하는 것이다. 하긴 내가 병원을 원래 싫어하지.


Step 01. 첫 번째는 역시 돈 걱정. 

정신과 진료가 그렇게 비싸다던데. 지금 내 형편으로 가능할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진단을 받고 싶은 건가? 약을 받고 싶은 거야? 내 이야기를 깊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을 받고 싶은 거야? 생각해봐도 정리가 안 된다. 모든 병명이 그렇듯이 정신과 병명은 의사들이 만들어낸 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감기'처럼. 그런 진단을 받아서 무얼 하나? 진단명 뒤로 숨고 싶은 건 아닐까? 나 아픈 사람이니까 건드리지 마. 이런 경고라도 하고 싶은 건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졌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있더라. 서울시 청년들에게도 정신과 진료비를 3회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었다. 지정된 병원만 지원해주는데 신촌에도 있고, 합정에도 있었다. 오예. 홈페이지에는 청년들의 정신건강을 약식으로나마 체크해보는 칸이 있어서 해봤다! 워워어,,, 이 정도면 병원에 가봐야 할 이유가 되겠다. 


스트레스 지수 : 매우 높음

우울 지수 : 매우 높음

불안 지수 : 매우 높음


Step 02. 진료 예약하기

병원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해 두고도 망설인다. 정신과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이다. 이번 정신과 진료는 내 인생에서 3번째 시도이다. 앞의 두 번은 모두 안산이었는데, 첫 방문에서는 "배울만큼 배우고 똑똑한 분이 무슨 이런 것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과를 왔느냐."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비용이 너무 비싸서 그냥 나왔던 기억이다. 이제는 정신과 진료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어서 많이 저렴해졌다지? 며칠을 망설이다가 애인에게 말을 꺼냈다. 정신과에 가보려 한다는 내 말을 들은 애인은 "그럴 수 있지. 보라가 그렇게 생각하면 가봐야지."라고 말해준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어 겨우겨우 예약을 했다. 


Step 03. 병원 가기

예약을 해두고 나니 또 고민이 많다. 병원에 혼자 가기가 무섭고 싫어서 첫 진료 날, 애인에게 또 말을 꺼냈다. 

"오늘 내가 가려는 병원은 교통사고 때문에 평소에 가던 한의원이 아니라 정신과야."
"아, 저번에 예약했어?"
"응. 근데 병원에 막상 가려니 좀 어려워... 너한테 같이 가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못하겠어."
"그랬어? 그럼 같이 가자. 난 괜찮아. 이럴 때 애인 써먹는 거야."
 "ㅠㅠ 고마워."


내 애인은 처음 해보는 일들이 많다. 그 처음이 대부분 나랑 해보는 것들이라서 좋다고 했다. 그런 애인에게 물었다.

"저번에는 나랑 산부인과를 가봤는데, 이번에는 정신과를 다 가보게 됐네? 기분이 어때?"
"신기해. "
"정신과 다니는 애인, 어떻게 생각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거지~"
"나 의사 선생님한테 얘기하다가 울면 어떻게 해??
"울어도 돼. 우는 게 뭐 어때? 눈물 나면 참지 않아도 돼. 하고 싶은 이야기 빼먹지 말고 다 하고 와. 다 얘기하고 와. 기다릴게. 괜찮을 거야.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와. 나 여기서 기다릴게."


내가 내 상태에 대해서 잘 말할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싱긋싱긋 정신과 진료 대기실에서도 싱그럽게 웃는 애인 얼굴을 뒤로하고 진료실에 들어간다. 문이 열리자 진료실에 앉아있는 의사 선생님이 보인다. 아! 완전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가 내 얘기를 잘 들어주실까?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 이 할아버지도 내 얘기는 안 듣고 본인 얘기만 하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소파에 편하게 앉으라고 말해주고는 기다리셨다. 가만히. 의외로 길게 기다려줬다. 


Step 04. 첫 진료

내 상태를 듣고 싶다는 의사 선생님에게 말을 시작했다. 의외로 많은 얘기들이 나왔다. 불안하다는 얘기, 오늘 밤 꿈에서 누군가 나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는데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는 이야기, 몇 달 전에 과호흡으로 잠에서 깼던 이야기, 우울한 감정이 생리 전에 특히 심해진다는 이야기, 회사를 그만두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이야기.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돈이 생겨도 그렇더라는 이야기.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간다는 이야기까지.


원래는 공대를 나와 회사를 다녔으나 최근 몇 년은 시민활동 영역에 있었다는 내 인생을 듣고 선생님은 의견을 냈다. 내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고. 과거에는 1에 1을 더하면 2가 되는 게 당연한 명확한 영역에서 살았는데 시민활동을 하는 몇 년 동안에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 인간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내는 불완전하고 애매한 것들 사이에서 많이 방황한 것 같다고.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적응을 잘하지 못한 것 같다고. 


그런 건가? 나는 지금까지 이 두 영역의 문제를 '혼자 하는 일'과 '함께하는 일'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하는 일은 어찌어찌하겠으나, 여럿이 하는 일은 어렵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브러치 카테고리도 "이런 나와 그런 네가 함께 살기"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협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 나니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방황한 건가.



요즘 나는 현재도 미래도 불안하다. 집도, 돈도, 건강도 모두 불안요소. 나는 이런 불안요소가 인생에서 개선되면 내 불안도 함께 개선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정신과에 오는 것보다는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더 나은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선생님은 상황이 나아지면 불안도 나아진다고 했다. 다만 지금처럼 힘든 마음 상태에서 내 상황까지 바꿔내려면 더 많이 힘들어지므로 약의 도움을 받는 걸 추천한다는 의견이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언제부터 불안했냐고. 답을 못 찾겠더라.


Step 05. 약 처방

약을 처방받았고. 4일 먹어보기로 했다. 4일 만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을까 싶지만 의사 선생님 말에 따르면 4일이면 신체 증세는 바로 달라진단다. 3번까지 무료로 다닐 수 있으니 열심히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 애인도 옆에 있으니까. 약 먹고 조금 나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계속 상담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Step 06. 희망 갖기

애인과 운동하고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는 약을 먹으면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동안 나는 누군가의 곁을 지키느라 고생했나 봐. 앞으로 내 곁을 지켜줄 네가 걱정된다. 너는 얼마나 또 고생일까. 그래도 곁에 있겠다고 해주는 네가 있어서 또 이 이 시간을 보낸다. 너라는 한 사람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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