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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서른여섯, 대기업에 지원서 쓰기

by 보라체

실업급여를 받을 조건이 안 된단다. 몇 개월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렵게 됐다. 바로 구직사이트를 살펴봤다. 딱 세 곳, 원서 쓸 곳이 있다.


1.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대학원 전공과 5년 전에 일했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

육아휴직 대체인력으로 1년 계약직을 모집하고 있더라. 내가 했던 일이라서 아마 원서를 쓰면 붙을 것 같다. 단점은 경기도에서 서울 출근이라 출퇴근 시간이 길고 고되다는 점이다. 월급도 200 초반에서 중반 즈음. 합격해도 걱정이다.


2.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시설 행정직

마찬가지로 육아휴직대체로 1년 근무할 사람을 뽑더라. 교통도 괜찮고, 출퇴근 거리도 서울만큼 멀진 않다. 다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지역사회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뭘 쓸 내용이 없다. 이게 되겠냐고요. 아마 월급은 200 초반에서 중반 즈음. 여기 지자체 생활임금 수준에 맞춰서 준다더라.


3. 우리 집 앞 대기업

내가 대기업에? 그게 되겠냐? 10여 년 전 즈음 취준 할 때에도 인성검사에서 탈락하던 사람이 나다. 적성보다 인성이 별로였다. 너무 신기했지. 누구나 신기해했다. 인성이 안된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인적성 문제집을 구입해서 풀고 외우며 해봤지만 영 안 되더라. 그래서 포기했더랬다. 공공기관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됐지만 잊을 수가 없었다. 내 인성이 그렇게 쓰레기인가? 대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는 절대로 아닌 건가? 이후에 사회복지시설에서 일하는 내내 깨달아야 했다. 아, 내가 이래서 안 됐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서는 써야 한다. 집 앞에 걸어갈 수 있는 직장. 초봉이 5천만 원도 넘는다는 꿈의 직장. 아마도 ADHD 덕분에 생긴 버릇이겠지만 출퇴근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는 나한테 너무 딱 잘 맞는 유연근무제! 심지어 이번에 모집하는 직군이 내 대학원 전공 분야더라?


이런저런 이유로 오랜만에 지원서를 써 보려는데 이건 뭐 얼마나 걱정되고 불안한지 통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뭐가 제일 불안하냐 물으면, 그건 바로 블라인드 채용이다.


성별, 나이, 출신학교, 결혼여부를 보지 않는단다. 원서 쓸 때 꽁꽁 숨겨서 적으라고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주의사항이 빨간 글씨로 빼곡하다. 라떼는 이런 건 없었는데.


블라인드 채용이면 나한테 좋은 거 아니냐고요?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블라인드 채용 환영하겠지? 나는 실력에 자신이 없다.


내 실력이라는 게 그렇게 엉망진창만은 아니다. 남들 못 하는 것 중 나만 할 수 있는 것도 꽤 있고. 이후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예전보다 나아진 점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지원서를 작성하기가 고통스럽다.


또 다른 고통도 있다. 이 분야에서 일하며 겪은 지독한 성차별이 싫어서, 강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로 구성된 직장 내 빈부격차가 싫어서, 밤마다 미국 동쪽에서 공부한 사람과 서쪽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잔을 기울이는 학력차별이 싫어서, 계약직이라서, 혹은 그들 무리에 낄 수 없는 이방인이나 주변인으로 들러리처럼 있는 것도 싫어서, 무튼 싫은 이유가 많았고 다 싫었다.


내가 얼굴이나 몸매가 되면 이 직장에서 트로피라도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이어트에 매진했던 시간도 있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바람에 다행히 실패했다.


내 능력의 부족함을 직면하고 보완하려 노력하는 고통보다 그들과 그들의 부모, 그들을 대우해 주는 사회를 탓하는 쪽을 선택한 건 왜였을까.


그들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동안 나는 고립됐다. 정규직 신입들에게는 몇 개월에 걸친 업무 트레이닝이 있었지만 나와 같은 계약직들은 출근한 날 오후부터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비정규직인 내겐 책임지고 일할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정규직의 지시를 받이 함께 일하는 구조가 됐다.


어떤 분은 내게 업무에 대해 피드백을 주셨지만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고맙다고 말하는 게 끝이었다. 내가 일을 잘 못 한다는 말은 회사 휴게실에서 처음 들었다. 내가 대화를 듣고 있는 줄 모르니 꺼낸 말씀이셨겠지만 상처받았다. 그렇게 점점 일이 줄고, 내가 여기 왜 있는 건지 모르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다른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업무 트레이닝이 없었다. 공공기관이었지만 규모가 너무 작기도 했고, 내가 이미 경력 몇 년 이상의 중고신입이었으니 대부분 할 줄 알 거라 여기셨겠지. 그렇게 바로 투입될 사람으로 나를 뽑으셨던 걸 테고. 트레이닝을 못 받아서 내가 '일못'인 건 아니겠지만 이런 배경도 있었다는 걸 누군가에겐 말하고 싶었다.


원서를 쓰자니 그 옛날 겪은 생각과 감정이 마구 떠오른다. 또 같은 일을 겪을까 봐 혼란스럽고 두렵다. 또 나 자신이 무능을 보게 될까 봐.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한들 달갑지가 않다


막말로 서류에서 블라인드면 뭐 해? 어차피 서류에 적힌 경력만 봐도 나이가 드러나는 걸. 어차피 면접에서 내가 여성이고 결혼과 출산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다 드러날 텐데. 에잇.


그래도 알고 있다. 합격 여부는 어차피 내 권한 밖의 일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답은 알지만 이 모든 감정이 쉽지가 않다. 한 달 뒤, 나는 합격해 있을까? 계속 원서를 쓰고 있을까? 어디에 합격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집을 둘러본다. 넓은 집. 내가 한 번도 꿈꿔 보지 못할 정도로 넓은 이 집을 둘러본다. 생각지 못했던 불행이 있었듯이 생각지 못했던 행운도 있었다. 크고 편안한 거실, 따뜻하고 푹신한 침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민 내 작업실, 두 개나 있는 화장실까지. 모든 것이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다. 이 집이 한 달째 말을 걸어온다. 아무리 네 인생이어도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불운도 행운도 네 몫이 아니라고.


내 옆에서 숨 쉬는 애인을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진심을 담아서 말해주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를 꽉 껴안으며 내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 나 몰래 이런저런 궂은 가사노동을 처리하는 이런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할 거라 기대해 본 적 없었다. 이 좁고 척박한 땅에 넌 어디서 나타났니? 내가 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나이차 따윈 잊은 채 누군가를 열렬히 쫓아다니던 내 모습도 놀라웠다. 그런 사람이랑 연애하게 되고,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였다.


신도시의 방3화2 아파트에서 사랑하는 애인에게 매일 사랑고백받으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다시 맞이하고. 이거 실화임? 단 한 번도 이런 미래를 꿈꿔본 적 없었다. 꿈꾸는 것조차 너무 과분했던 미래가 어느새 내 곁으로 와 우리의 지금이 되어있다.


예측할 수 없는 불행처럼 예측할 수 없는 행운이라는 게 존재한다. 뭣도 없는 내 인생에도 행운이라는 빛이 존재한다. 믿어도 되나?


그냥 제발 그냥 좀 믿으면 좋겠다. 내일이 입사원서 마감일이다. 이제 제발 딴짓은 그만하고 입사지원서를 좀 써야 하지 않을까? 하, 쫌 믿어봐라, 너를! 그리고 네 인생에도 행운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좀 받아들여. 인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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