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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주변인'을 떠나보냅니다

by 보라체
주변인 -> 보라체


브런치 작가명과 유튜브 채널명을 바꿨다. 애초에 왜 닉네임이 주변인이었는지 설명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 자신보다는 누군가의 딸, 친구, 선배, 동료 역할을 수행하는 주변인으로써 사회적인 나에게 더 큰 비중을 주었더랬다.


그리고 주변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폭력피해자, 우울증 환자, 세월호 유가족분들,,,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사람의 곁을 지키는 주변인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좋은 주변인이 되어 함께 살아남아 희망의 노를 저어보려 했다.


좋은 주변인이 되겠다는 꽤 그럴싸한 내 방향성에는 오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나라는 사람이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눈치와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좋은 주변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라니. 되고자 하는 나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한 내 모습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자꾸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송구했다. 나는 그들을 배려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내게 배려, 사랑, 돌봄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나도 보답하겠다며 여러 노력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노력을 '주변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



첫 번째 노력은 나라는 사람의 처지와 기분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뭘 느끼는지 알아야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주변에서 내게 베풀어준 배려와 돌봄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상해 낼 수 없는 구체적인 말과 행동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내 주변 공감장인들의 명대사와 명장면을 적어놓고 나와 내 주변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달까. 내가 되고자 하는 방향을 적어 두니 목표의식이 흐려질 때마다 다시 열어 볼 수 있는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세 번째는 내 곁의 주변인들과 함께 살아가며 내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결과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어떤 날에는 '이제 내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 또한 좋은 주변인이 되어 은혜를 갚아보고자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하듯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 더 좋은 주변인이 되고자 노력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제발 서로에게 조금만 더 따뜻해지기를. 제발 스스로의 감정을 잘 돌보기를. 자녀에게, 친구에게, 부인이나 여자친구에게, 후배나 부하직원에게, 매장 점원이나 경비원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지 않기를. 아무도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세계평화! 내 소원이 그거였다.


세계평화 소원이 성취되진 않았다. 좋은 주변인으로 스스로를 완성시켜 버렸다거나, 좋은 주변인이 되겠다는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태평성대가 내 안에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날, 그냥 갑자기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그냥 어떤 순간이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 이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구나!



가족과 연을 끊은 게 영향을 미쳤을까. 직장에서 겪은 성희롱 사건을 모른 척 눈감지 않고 끝까지 싸워낸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까. 정신과 진료와 심리상담이 영향을 미쳤을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나를 향한 내 주변인들의 사랑과 존중이 영향을 미쳤을까. 장대비처럼 내 영혼을 다 적시는 애인의 곧은 사랑이 영향을 미쳤을까.


그래서 이제 주변인이라는 익명에서 벗어나 '보라'라는 내 이름을 써보려고 한다. 뭐 보라도 실제 내 이름은 아니고 활동명이지만, 나한테는 내 실명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실명은 내가 정한 이름이 아니라 타인이 지어준 이름이라 애초에 나랑 심리적 거리가 좀 있다. 어려서부터 내 실명을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원래 잘 쓰지도 불리지도 않던 이름, 내겐 그저 이름일 뿐인 이름은 잊었다.


'보라체'라는 폰트가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 시선과 내 감성으로 세상을 보련다. 내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보라체로 기록하련다. 엣헴. 말하고 나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설명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 그냥 그렇다 정도로 알아주시라. 우리네 정체성이란 본디 흘러야 제 맛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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