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퇴사 후 열흘, 현장 상황 중계합니다

by 보라체

퇴사를 생각하지 않았던 아주 먼 옛날부터 퇴사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카톡 메모장에 잔뜩 적어두었다.


그림책 완성 및 투고 / 사회복지실습 / 양평원 교육 / 소설 쓰기 / 성매매상담원교육 / 가폭상담원교육 / 친구네 즉흥극 홍보자료 만들기 / 에일리세계관 만들어보기 이외에 유튜브에 올리고 싶은 콘텐츠 10개, 코너명 4개


퇴사 한지 열흘 된 지금, 이 리스트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은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다. 퇴사 후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3일을 쓰고, 이사 온 집의 에어컨에 적응이 안 되었는지 인후염으로 시작한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려 일주일째 컹컹 늑대 같은 기침을 달고 살고 있다고 하면 변심에 대한 설명이 될까?


어제는 콧물이 멈춘 기념으로 그림책 작업을 해봤는데 결과물이 내 생각보다 너무 별로라서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해 버렸다. 500피스 퍼즐, 1000피스 퍼즐을 하루 이틀 만에 완성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루 만에 맞춰버린 1000피스 퍼즐


아, 이 짧은 기간 동안 상담을 네 번이나 받았다. 종합심리평가 결과에 대한 해석 상담을 받았고, 새로운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과 치료 관련 상담도 했다. 오늘은 경기도감정노동자심리지원센터를 통해 시작한 심리상담 1회기를 받고 왔다. 가정폭력상담소에서도 상담을 받았다. 원가족이 내 새 주소를 열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주민등록등초본 열람제한" 신청을 하려고 했더니 가정가정폭력상담소에 가서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받아 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삼담자, 의사샘 모두 내 얘길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좋더라. 스트레스가 너무 높고 뇌가 긴장상태라는 소견이 인상 깊었다. 강제로 쉬게 하는 약을 처방해 주신 덕분에 밤 11시가 되면 강제로 취침하며 휴식을 확보해보고 있다.


하긴 감기 걸려 병원도 다녀오고, 퇴사했지만 볼 일이 있어서 이전 직장에 다시 다녀오기도 했으니 꽤 바쁘게 지냈나.


사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사회복지실습도 알아보고 실습처도 구하는 등 별 일을 다 하기도 했었다. 의사샘이 좀 쉬어야 한다고 해서 이튿날 모두 취소하긴 했다만.


친구가 국회에 자리가 있다고 이력서 넣어보면 어떻겠냐고 전화를 주었지만 이제는 경기도에서도 외곽에 살게 되어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좋은(?) 기회를 흘려보내며 내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그동안 직장을 많이 바꿨다. 제일 길게 일한 곳이 2년 9개월 일했던 상담소이다. 상담소 월급이 300에 승진체계가 있었다면 나는 상담소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이것도 변명이지 싶은 마음에 죄책감이 든다.


성공하고 싶다. 그치만 너한테 성공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게 대체 뭘까. 유명해지길 바라나? 부자가 되길 바라나?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인가? 살고 싶은 삶은 지금 내 삶과 거리가 먼가? 가까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언가 되려 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굳게 내걸었던 다짐은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 같은 '신도시'라는 공간에서 자꾸만 위축된다. 저런 차를 타려면 얼마를 벌어야 하지? 무슨 일을 해야 저런 돈을 벌지? 아파트가 어떻게 이렇게 많지? 집이 몇 채씩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다른 사람들이 밀고 가는 유아차마저 비싸보여 부럽다. 내가 아기를 낳으면 유아차는 무슨 돈으로 사나? 같은 생각으로 빠진다. 이런 생각은 돌고 돌아 결국 '내가 돈을 벌 수 있긴 할까', ;우리 애인이 나 때문에 고생하게 되면 어쩌지' 같은 연약한 질문까지 도달하며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아버린다.


신도시 공원의 아파트뷰


일단 지금 뭘 하고 싶냐고 누군가 묻는 다면 글을 쓰고 싶다. 그냥 매일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쓰고 싶다.


글 쓰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묻는다면, 온라인방송이다. 꾸준히 하거나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싶지는 않지만 경험해보고 싶다. 번지점프하듯 한 번 퐁당 뛰어들어 내 발 끝부터 머리끝까지 푹 절여지고 싶은 분야이다.


지금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방송 플랫폼도 정하지 못하고, 장비세팅도 못 하고 시작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렇게 매일 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무언가는 시도해 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무책임하게 낙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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