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가 계속 가는데 받질 않는다. 휴대폰에 찍혀 있는 마지막 연락은 작년 1월이다. 근 2년 만인가.
요즘 모래놀이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커다란 상자 안에 모래사장처럼 펼쳐진 하얀 모래를 만지작 거리면 기분이 좋아져서 아무거나 술술술 마구 말하게 된다.
모래놀이상담실은 비좁지만 벽면 2개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은 피규어가 전시되어 있다. 동물, 나무, 사람, 가구, 그릇, 음식, 무기... 아기자기한 피규어들은 너무 예쁘다. 하나씩 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려서 당혹스러워.
한 번은 상담 선생님께서 원하는 만큼 피규어를 갖고 와서 모래판 위에 올려보라고 하셨다. 이 중 피규어를 가지고 오라니 뭘 가져가면 좋을까? 하나도 아니고, 가지고 오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갖고 오라 하시니 이걸 어쩌면 좋지? 나한테는 행복한 고민이다.
디즈니공주 5인방을 가져왔다. 엘사, 엘사, 자스민, 인어공주, 라푼젤.
상담샘 : 이 장면을 좀 설명해 주세요.
나 :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제 친구들이에요.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친구들. 멋진 친구들이요. 그런 친구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티타임을 가져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얘기를 나눠요.
상담샘 : 여기에 안나가 있네요. 안나는 여기 왜 있나요? 안나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안나가 여기 왜 있지? 겨울왕국을 좋아하지만 나는 안나보다는 엘사가 좋다. 겨울왕국 1 주인공은 안나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엘사에 더 감정이입이 잘 됐다. 안나는 항상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피규어 중에서 나는 왜 안나를 가장 먼저 골라 잡았을까?
나 : 잘 모르겠어요. 엘사랑 세트인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상담샘 : 그러면 언니들이 얘기할 때 안나는 뭐 할까요?
나 : 안나는 언니들 얘기하는 걸 듣고 있어요.
상담샘 : 안나가 얘기를 듣고 있다고요? 흠... 그럼 여기서 안나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네요.
응? 안나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안나는 그냥 듣기만 하는 건데 왜 안나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걸까?
왜 안나가 여기서 언니들 얘기를 듣고 있는지, 왜 언니들은 안나가 있는 곳에서 자기 얘길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보자고 하신다. 모래놀이 상담에서 피규어를 고를 때 피규어를 고르는 순서도 중요하다고 하더라. 내가 제일 먼저 잡은 피규어가 안나였다고 한다.
사실 나와 내 친구들은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활동을 하다 보면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세상이 되고,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되고, 세상은 세상이 되어 서로 다른 두 편으로 홍해 가르듯 나눠지곤 한다.
그때 세상과 우리의 다리 역할을 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동생이었다. 우리 얘기를 들어주고, 우리의 활동을 궁금해해 줬다. 우리의 활동이 진짜 세상을 바꾸는데 한 톨만큼이라도 도움이 될지 어떨지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주기도 했다.
내 얘기를 듣던 상담샘은 동생의 역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때 너한테 화낸 거 미안하다고, 너무 화가 나서 갑작스럽게 그렇게 말하게 됐다고. 그동안 나한테 잘해줘서 고맙다고.
어제 보낸 문자에 답장이 없길래 오늘 전화를 걸어본 것이다. 동생도 나한테 화가 났을 텐데 과연 내 전화를 받아줄까?
"여보세요? 언니?"
동생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꽤 상냥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그 사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이제 부모님과 언니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 그동안 고마웠다고 너만 괜찮으면 만나고 싶다는 나의 말에 흔쾌히 응해주는 동생, 쿨하다. 나이스해.
그리고 내일,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건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민했지만 동생과 헤어질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그날의 나를 보면서 동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와 헤어져있는 동안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내일은 얘기가 잘 될까? 잘 되면 앞으로도 동생은 보고 살 수 있으려나? 생각이 많아 잠이 오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