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한 번만
누군가는 코로나 때문에 가족도 만나지 못한다고 속상한다던데 난 반대였다. 코로나 덕분에 가족을 만나지 않을 수 있어서 조금 기뻤다. 당당하게 부모님께 "부모님 만나기 싫어요." 말할 수는 없었기에 은근히 가지 않는 방식을 어쩔 수 없이 택하고 있다. 꼴에 부모님께 상처주기는 싫어서. 이런 내 생각과 태도가 부모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얄팍한 기대를 아직도 갖고 있어서.
오늘은 참 버거운 하루다. 어제저녁부터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눈물 콧물을 한 시간이나 뽑아냈다. 공무원으로 평생 일하신 아버지께서 이달 말 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연락이 시작이었다. 퇴직을 앞두고 두 동생은 행사인지 여행인지를 신나게 준비하고 있다.
너무 신이 났는지 돈을 많이 내자고 한다. 각자 45만 원씩 더 내자고. 이미 셋이 모아둔 돈이 90만 원인데 더 내잔다.
내겐 돈이 없다. 창업을 했다가 빚이 남았고 대학원 학자금 대출을 아직 갚고 있다. 지금은 200이 안 되는 월급으로 매달 100만 원의 대출금을 갚으며 청년주택에서 살고 있다. 동생들에게 말했다. 45만 원은 너무 많고 40만 원으로 해 보자고. 그 정도는 적금을 깨면 가능하다고.
올해 처음으로 직장을 얻은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이럴 때 돈 좀 쓰자~ 이럴 때 쓰려고 돈 버는 거잖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 남동생. 나보다 8살 어린 내 동생. 처음 두 발을 딛고 일어서던 순간부터 첫걸음마까지 모두 기억이 나는 내 동생. 할머니가 아들을 원해서 엄마가 힘들게 늦은 나이에 낳아준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내 인생에 대해 1도 모른다. 내 인생을 이해하고 싶지가 않단다. 최저임금 받는 건 누나가 선택한 건데 자기가 왜 알아줘야 하냐고 물어본다. 기가 찬다. 네가 어떤 동생인데 네가 이런 어른이 되다니.
남동생의 탄생 배경은 차별과 박해였었다. 할머니는 아들을 원했지만 우리 엄마는 딸을 둘이나 낳았다. 할머니는 엄마를 어마어마하게 괴롭게 했다. '아들도 못 낳고', '아들을 못 낳으면',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등 할머니의 모든 말에서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들 얘기가 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임신했다. 그 시간을 8년 버텨낸 엄마에게 온 선물 같은 아들이 지금 내 막냇동생인 것이다.
8년 동안 엄마만 박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딸로 태어난 나와 내 동생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장녀라며 자꾸만 무슨 역할, 의무를 부여했다. 아들이길 간절히 바랬으나 딸로 태어난 둘째의 돌잔치 사진은 남자 한복을 입혀 찍었다. 여동생의 아기 시절 사진 속 헤어스타일은 대부분 스포츠머리인 것도 같은 맥락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들이 태어난 뒤 차별은 더욱 유별나고 뻔뻔해졌다. 아들에게만 용돈을 쥐어주는 친척들, 아들의 옷만 사주는 할머니, 아들은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하고 딸들에겐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는 부모님. 아들은 공부를 잘해도 우쭈쭈. 키가 커도 우쭈쭈. 나는 공부를 잘해도 당연하다고 하고 공부를 못하면 못 생기고 뚱뚱한 계집애가 공부까지 못하는 걸로 취급되는 냉혹한 차별이었다. 나는 나중에 대학원까지 갔는데 계집애가 공부까지 많이 하면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냐며, 지 엄마 생각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지 뱃속만 채우는 이기적인 불효녀라고 호통을 들었더랬다.
이런 차별은 시간을 따라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고 내 인생엔 수많은 멍이 들었다. 너무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이 모여서 사건이 되고, 사건이 모여서 시간이 되었다. 슬프게도 인생은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내 인생은 곳곳이 멍투성이이다. 서른 중반이 된 아직까지도 부모의 인정을 바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 아닐까.
아들 또한 마찬가지라더라. 아들이라고 추켜 세워지고 이것저것 기대를 한 몸에 받아 힘들었다고 한다. 아들의 인생에도 멍이 들었다 한다. 내가 그 멍까지 돌봐야 하나? 그 멍이 있다 한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알바 10개를 했던 내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넌 대체 뭘 했는데? 밥 사 먹을 돈이 없어서 3천 원으로 3일을 버티던 내 인생을 위해 네가 뭘 했는데? 9살 내가 1살 너한테 분유 먹이느라 팔이 아파서 꾀좀 부렸다가 엄마한테 혼났을 때 나도 애기였어 인마.
나는 몇 달치 월급을 모아 최저가로 손 부들부들 떨며 노트북을 마련할 때 너는 왜 아빠가 노트북을 사주는 건데? 나는 알바로 생활비 벌어 쓸 때 왜 너는 수십만 원짜리 청바지를 사 입는 건데? 나한테는 시장표 짝퉁 잠뱅이 운동화도 안 사주던 엄마가 왜 네 운동화는 25만 원짜리 조던으로 사주는 건데? 왜 너는 밤늦게 들어오건 안 들어오건 안 혼나는 건데? 나는 8시에 들어와도 혼났는데? 너는 취준생일 때도 매 끼니 삼겹살을 먹는 건데? 나는 취준생이 밥을 먹는다고 혼났는데? 네가 한 게 대체 뭔데? 네가 아는 게 대체 뭔데? 정말 궁금하다.
엄마는 어떤지 모르겠다. 아들을 낳고 조금의 신분 상승을 이루긴 했다. 적어도 할머니께 "아들" 얘기를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증거이다. 하지만 또 별로 달라지지도 못했다. 여전히 엄마가 할머니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제사인지 차례인지에 불려 가서 너무 이른 새벽이나 너무 늦은 밤에 음식을 하고 상을 차려야 했다. 그렇게 불려 가는 날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은 골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즈음엔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냈고, 아빠는 큰 목소리로 응대하거나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와 칼을 들고 집안 곳곳을 누볐다. 이상하게도 차별이 굳건해질수록 엄마는 아들을 소중히 여기고, 딸에게 폭력적으로 대했다. 아들은 동아줄, 딸은 썩은 동아줄인가?
엄마의 속상한 마음은 특히 나를 향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내 손을 잡아준 적이 없다. 늘 뒤통수를 보거나 옆모습을 봐야 했다. 안아준 적도, 따뜻한 말을 해 주지도 않았다. 엄마의 모든 말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했고,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노는지 내게 듣는 족족 반대했다. 수학 공부를 안 하고 영어 공부만 한다고 혼나기도 했고 공부를 너무 오래 한다는 이유로 혼나기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맞아 본 사람이다. 아마 엄마가 유일하게 때린 사람은 내가 아닐까? 엄마에게 두 번 맞았는데 한 번은 스무 살 때 가장 친한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겠다고 했다는 게 이유였고 두 번째는 내가 스물다섯 일 때 이삿짐 정리를 빨리 끝내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매일 자정까지 야근하는 스물다섯 직장인에게 어떤 엄마가 뺨을 때릴 수 있을까?
엄마는 내게 뾰족한 유리알이었다. 엄마와 접촉하는 모든 시간에서 나는 다쳤다. "정신병자처럼 왜 그래?" "너는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못 하니?" "네가 뭔데 네 맘대로 해?" "공부 좀 했다고 유세하니?" "밥도 못 하는 게" "동생 밥 챙겨 먹여라."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컸다. 내 인생에 멍이 들지 않을 방도가 있었나?
나는 나를 변화시키느라 많은 에너지를 써왔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나를 변화시키며 절절하게 깨달은 진실이다. 그만큼 나를 많이 관찰하고 내게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이론을 공부하고 바깥세상에 시도하며 한 땀 한 땀 힘겹게 만들어낸 변화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그런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주는 애인도 있다!
이 유구한 35년 간의 노력을 가족에게 인정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괴로운 것 같아.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것이.
최근까지 연간 다섯 번 정도 원가족을 만났다. 각 명절 두 번, 엄빠 각 생신 두 번, 어버이날 한번. 이제는 더 줄이겠다는 결심이다. 일 년에 많으면 두 번, 적으면 한 번 이하. 일단 명절은 가지 않겠다. 이미 한 번씩 걸러서 가고 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가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여행처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선택은 하지 않겠다. 최대 5시간이다 진짜.
원가족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원가족에게 지지받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럽고 신기한 건 사실이다. 명절 때 서로를 찾아 만나는 사람들도 곧 부러워하게 되겠지. 상관없다. 부러워하는 게 뭐 대수라고.
내 시간과 내 인생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걸 내가 알아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명절을 만들 거야. 인생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내 시간을 채우는 거 아닐까?
나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이제 내 인생에서 나가줘요.
이건 내 인생이야.
나를 원한다면 나를 사랑해줘요.
나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내 슬픔을 들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