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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un 23. 2024

ADHD의 인생에도 희망이?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그렇게 본다면 ADHD인 내 뇌는 어떤 컴퓨터일까?


기억장치는 엉망이다. 그러니까 메모리는 거의 안 달려있다고 봐야지. SSD, HD는커녕 USB, CD, 디스켓 정도의 이동식 저장장치 수준도 안 되는 저용량이다. 무용량에 가까운.


모든 ADHD가 그런 건 아니려나? 그건 모르겠지만 ADHD인 나는 저장용량이 '0' 수준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다. 기록되지 않은 과거는 삭제되고 흩어져서 사라진다.


그럼 기록을 열심히 하면 과거가 존재할 수 있게 될까? 애석하게도 내게 과거란 항상 불완전한 기록의 조각으로 남는다. 기록하는 그 순간조차 기억은 휘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실시간으로 휘발되는 기억을 붙잡아 기록하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어느 날부터 다행스럽게도 때려치울 수 있었다.


과거를 붙잡지 않기로 선택한 이후로 나는 현재와 미래만을 보고 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과거라는 토대 없는 현재는 위태롭고 허무하더라.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이 앞으로 가는 것인지, 위로 가는 길인지 기본적인 방향조차 알 수가 없더라.


그래서 그냥 헤매기로 했다. 그게 삶이겠거려니, 내게 주어진 운명이겠거려니.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앞이건 뒤건, 어차피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므로 알고자 하려는 마음 자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다들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그래. 여기까진 어찌어찌 정리했다. 과거는 붙잡지 않으리라. 현재는 알려고 하지 않으리라. 그래, 미래. 미래에 대한 고민만 남았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방랑자로 생과 삶을 떠돌게 될까? 나도 현실이라는 땅에 두 발 딛고 남들처럼 똑바로 서있을 수 있게 될까? 그런 날이 나한테도 올까?


불안했다. 오지 않으면 어쩌나.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봐 불안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나한테만 그날이 오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이렇게 영원히 세상을 부유하게 되면 어쩌나. 이렇게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게 웬 걸? 그날이 온 것 같아!


어쩐지 조금 괜찮아진 나를 발견했다. 이 기분, 낯설어. 새로워. 이상해. 하지만 따뜻해.


요즘 꽤 열심히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비정규직 초단시간 근로자로 정해진 요일에 정해진 장소로 출근해서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보기 좋다. 어쩐지 주제넘게 자꾸만 열정을 쏟아붓게 되지만 그마저도 나다워. 프리랜서 강사로, 상담자로 더 나은 강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데도, 만족할만한 강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초라해지지 않고 작아지지 않고 끈기 있게 강의 수준을 높여보겠다며 최선을 다 해내는 모습이 조금 멋지다고 생각한다.


일을 한다는 건,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구나! 어딘가에 열정을 쏟아붓는다는 건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과정이기도 했구나!


깨닫고 또 깨달으며 어제의 나를 깨고, 하나의 깨달음마다 하나의 소소한 기쁨의 감정을 느끼고, 또 그 감정 하나하나 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덧입히는 과정이 일하는 기쁨이었구나!


뭔가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계속 이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인지까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아쉽다. 하지만 지금 차오르는 이 마음이, 내 마음이 나한테 보내는 이 미약한 신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아.


한참 동안 혼자 이 느낌을 간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 감정의 이름이 '희망'일지도 몰라! 우와! 나한테도 희망이 생겼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지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의문.


그럼 그동안 나는 희망 없이 인생을 살아왔다는 건가?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그렇게 살아온 거지? 이 희망은 어디서 온 걸까? 일을 열심히 해서? 한 분야에 오래 있어서? 혹시 ADHD 약 때문인 건 아닐까? 이게 치료의 효과? 이 희망이 약물의 효과라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 그냥 마음 편하게 좋아해도 되나?


아! 슬프다. 좋은 일을 그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슬프다. 꼭 무슨 일이건 '이건 약 때문인가? 아닌가?'를 따져봐야 하는 게 번거롭고 불편하다.


무튼 기뻐하자. 기뻐하기로 했다. 기뻐해도 된다. 좋은 신호야. 소중한 일이야. 나한테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 이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나면 또 어떤 마음이 될까? 앞으로가 기대된다. 흥미진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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