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너무 많이 읽는 이유
어렸을 때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한글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심해졌다. 유치원 때는 자기 전에 머리맡에 읽을 책을 더미로 쌓아두고 읽었다. 한 장씩 여러 번을 넘겨 한 권을 다 읽으면 읽은 책들은 다시 그 옆자리에 새로운 더미로 쌓였다. 읽고 싶은 책들은 모두 읽어야 잘 수 있었다. 엄마랑 함께 잘 때라서 엄마 마음대로 불을 꺼버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어두운 방에 누워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 집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뭘까, '어른'이 되면 내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엄마, 아빠 사랑해요. (하트하트)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책 제목) 이 책 사주세요.(하트하트)
어버이날 나에게 이런 편지를 받는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린이가 돼서는 책에 욕심을 부렸다. 어버이날에도, 부모님 생신 때도 책을 사달라며 하트를 붙여 편지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책 사주기를 중단하셨다. 우리 집은 그렇게 많은 책을 살 수 없다고. 대신 주말마다 도서관에 태워다 주셨다. 내게는 컵라면 값 몇천 원과 함께 책을 싫어하는 동생이 주어졌다. 집에 가자면서 어디론가 자꾸만 사라지는 동생을 주말 내내 도서관 구석에 붙잡아 두고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때는 소설에 빠졌다. 온갖 음모론으로 가득한 현대소설이었다. 이과 고등학생이 수학 공부는 안 하고 책만 읽으니 자습시간마다 혼이 났다. 매번 교실 창문 너머로 독서를 감시당하자니 눈치가 보여서 책 표지를 문제집 표지로 바꿔놓고 읽었다. 아마도 그 덕분이겠지만 언어영역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이 괜찮았다.
대학에 들어갈 때 수능을 망했다. 점수에 맞춰 대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정이 안 붙어서 대학생활이란 것엔 관심을 끄고 강의실과 도서관만 오갔다. 공대만 있는 대학교라 도서관에는 공학에 관련되지 않은 책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그 책들을 마구 읽었다. '일본 소설' 코너의 책을 다 읽고 '프랑스 소설' 코너의 책을 다 읽었다. '심리학' 코너도, 책 제목에 '페미니즘'이 적혀있는 책도 그땐 다 읽었다. 읽어봤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그게 내가 느끼는 전부였다.
대전까지 내려갔던 직장에서 대상포진을 얻고 안산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책방, '들락날락'에 다녔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모임 첫날, 모임지기에게 했던 질문이다. 모임지기는 조금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지금도 너무 인상적인데 그의 답변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다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책 모임에 꾸준히 참석했다. 뭔가를 읽고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시시해 보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일이었다. 책모임에서는 내가 대충 읽은 부분, 읽었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명백히 드러났다. 내가 들여다보려, 헤아려보려 해 본 적 없었던 나의 과거가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 마냥 내 입을 통해서 마구 튀어나왔다. 책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소에 따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고, 그러므로 서로 친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모임에서는 서로의 인생을 포갤 수 있었다. 깊었다. 각자의 인생을 중계하고 해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모임을 하면서 나는 책을 읽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책모임 2년 차 즈음부터였다. 영화나 드라마는 24시간 내내 틀어놓고도 집중을 할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책은 단 한 페이지도 넘기기 어려웠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책이 읽히지 않았다. 시간이 길었다.
드디어 지난달, 몇 년 동안의 책 공백을 깨고 정혜신 선생님의 '당신이 옳다'를 완독 했다. 겨우 책 한 권 읽은 것뿐인데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동안 난 왜 책을 읽지 못했던 걸까? 나의 과거 책 읽기를 뒤적거려 본다.
난 분명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 많은 책을 읽었으나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의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기억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중독된 사람처럼 책에 매달렸다. 훑어 읽었지만 대충 읽지는 않았다. 토시 하나하나 정확히 읽되 내가 원하는 단어와 문장이 아니면 마음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서 내 마음에 남은 책이 몇 권 없는 걸까?
과거의 내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책을 읽었다면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찾는 것을 중단했던 건 아닐까? 태어난 이후 몇십 년 동안 뭔지도 모를 것을 찾아 헤맸으니 지칠 만도 하다. 어쩌면 포기했던 걸지도 몰라. 혹시 내가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는 것을 깜빡 잊은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잊힐 수도 있잖아?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돌고 도는 질문의 끝에 객관식 답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린다. "혹시 네가 답을 찾은 것 아냐?" 오! 그럴듯하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답이 있던 공대생의 삶에서
답 없고 불완전한 인간 '사회'로.
'명확하거나' '알려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이분법 세계에서
소수점과 무한대가 살아 숨 쉬는 자유의 세계로.
인간의 우주의 티끌이라고, 지구의 기생충이라고 해석하던 세계에서
한 명의 인간이 하나의 우주라고 선언하는 세계로.
이 변화 안에서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스스로를 낭비했다. 휘몰아치는 파도 위, 황량한 배 위에서 홀로 서서 기둥을 잡지 않고 버티려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도, 어둠을 밝혀줄 빛도, 단단하고 좋은 배도 다 필요 없다며 다른 존재를 거부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에너지를 소모했다. 도대체 이런 요지경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출근도 하고 승진도 하는 걸까? 궁금해하지 않고 비난했다. '치사한 방법을 썼을 거야.'
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나에게 주어진 생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은 어디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내보일 수 있는 나의 '옳음'은 무엇인가? 그 옮음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답을 찾진 못했다. 답의 실마리를 잡았다고나 해야 할까. 그 실마리나 나마 책에서 찾은 것인지, 경험과 관계에서 찾은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그저 이것들을 찾느라 그렇게 책을 뒤적거렸다는 것만 알겠다.
다행인 것은 이 실마리는 온전한 '내 것'이라는 점이다. '내 것'을 가질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난하게 방황했던 나는 이제야 어엿한 '내 것'을 가졌다. 이 소중한 새싹은 내 희망이다. 지금은 이 싹이 자라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소중히 키워내고 싶다. 언젠가 이 싹은 죽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죽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들이 내겐 있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여기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 몰라.' 인간의 행복에 누군가는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한 것을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어느새 생각이 나는 것이다.
나 지금 행복한가 봐.
여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행복하면 좋겠다.
앞으로는 내게 주어진 일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며 내 답을 꾹꾹 눌러써 내려가고 싶다. 앞으로의 내가 섬세하되 단단하기를, 흔들리되 그 뿌리는 깊기를, 자유롭게 멀리 가되 시작은 잊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책 읽기는 답을 찾는 책 읽기가 아니라 답을 써 내려가는 책 읽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