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상담원이 기대하는 것들
나는 아직도 교육을 받고 있다. 출근이 한 달째인데 아직 수화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모든 콜센터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 콜센터의 특징이다. 우리 센터에서는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 안내하는 곳이다. 생활과는 동떨어진 곳. 용어가 귀에 익는데만 일주일이 걸린다. 안내할 내용, 고객들이 사용하는 웹사이트 내용, 콜 응대 방식에 대한 내용까지 숙지해야 할 내용이 방대하다. 선배들의 콜상담을 듣고 있자니 한 달째 교육받고 있는 신입사원은 상상만 풍부해진다. 점점 기대되는 나의 콜 응대. 콜센터 신입 상담원의 기대란 이런 것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받는 순간이 있다. 길에서 세월호 관련 서명을 받을 때, 광화문에서 박근혜 퇴진 운동을 할 때 그랬다. 안산에서 성소수자 인권 관련 피케팅을 할 때에도 그랬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주고 더울 때는 시원한 음료를, 추울 때는 따뜻한 음료를 사다 주었다. "파이팅!"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캠페인이 있는 날들이 나에게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이었다. 콜 응대와 캠페인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 받는 아픔도 있을 것이다. 길거리 캠페인을 할 때에도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괜스레 와서 시비 걸고 욕하는 사람들. 실제로 우리 콜센터에도 지독한 전화들이 매일 걸려온다. 그럼에도 난 기대한다. 내가 센터에 앉아서 헤드셋을 통해 만날 사람들을. 어디 사는 누구세요? 어떤 문제가 있으세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내 기분이 좋아진다. 아쉽게도 평소에는 타인에게 정성을 다해 친절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다. 이유 없이 친절한 사람을 뭔가 수상하게 여기기도 하지. 무엇보다도 나 혼자만 세상에 친절하면 억울하잖아? 세상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콜센터는 다르다.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게 내 일이란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 일을 하면 월급을 준단다.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물론 감정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내가 아파도,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하고 친절해야 할 테니 얼마나 힘들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아야지. 답이 또 있겠지.
누군가를 대표해서 말할 기회를 얻었다. 콜센터 선배들이 자주 하는 말은 '저희 기관에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이다. 내가 취직한 곳은 대기업 홍보실도 아니고, 국회의 정당 대변인실도 아닌데 자꾸만 우리는 조직을 대표해서 말하게 된다. 콜센터에 들어오기 위해서 무슨 시험을 치진 않았다. 메일로 이력서 보내고 면접 보고 들어온 콜센터 상담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조직을 끊임없이 변호하고 대변한다.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그런데 왜 우리의 월급은 이렇게나 낮은 걸까.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은 하나도 없는 우리들에게 이상하게도 왜 이렇게 막중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이 상황이 싫지 않다. 민주주의의 본판은 랜덤 뽑기에 있다더라. 누가 누구를 대표해도 이상하지 않다면, 그곳이 평등하다는 증거다. 아무 자격도 없는 나에게도 조직을 대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아무 의미 없겠지. 그래도 누군가 믿고 맡겨 준다니까 일단 좋다. 그렇게 단순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 우리가 안내해야 하는 내용은 분기마다 업데이트되어 내용이 달라진다. 우리 기관의 조직도, 담당자의 연락처, 홈페이지의 내용까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그런 변화를 누구도 우리에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우린 스스로 알아서 변화를 스캔하고 적응한다.
변화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대기업과 국가 연구기관의 신사업을 준비하는 공모전에 도전하고, 국가의 정책과 예산 배분에 대해 연구했다. 말단 인턴이었지만 조직의 전략실에서 일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변화는 아니었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나를 한 스푼 얹었다. 나도 이 변화에 일조했다는 위안을 얻었다. 실제로는 내 일상 한 조각 변화시키는 것도 버거웠으면서! 이제는 변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벗어나 변화를 따르는 입장이 되었다. 잘 따라가야지, 의외로 으쌰 으쌰 나를 응원하게 된다. 리더 체질이 아닌 나는, 아마도 팔로워 체질일지도!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을 만드는 데 내 의견은 '1'도 반영되지 않았다. 내가 만들지 않은 규칙에 나를 맞춰본다. 이 규칙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모았을까.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 그 시간과 정성을 존중하기로 한다. 매뉴얼이 존재하고 그 규칙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물론 모든 매뉴얼은 불완전하지만 내가 혼자 만든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믿어 본다.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내용과 홈페이지, 다양한 사례들을 공부하고 업데이트한다. 자주 안내해야 하는 내용들은 나만의 노트필기로 정리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다. 내 노트에 자신이 있다면 여러 장 복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업데이트하면서 서로를 체크한다. 보통 '공부'라고 말하면 일상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상식이다. 여기서의 공부는 다르다. 콜센터에서 공부하는 것들은 오늘 배우면 오늘 써먹는다. 선배들을 보니 간혹 써먹으면서 배우기도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걸까?
다른 콜센터는 모르겠지만 우리 콜센터의 경우, 매뉴얼에 전적으로 의존해선 안된다. 우리 콜센터 고객들은 매일 창의적이다. 8년 넘게 일한 선배들 말에 따르면 '이런 질문이 있을 수가 있는가' 싶은 질문이 매번 새로 나온단다. 그 어떤 문제라도 잘 해결해보고 싶다. 평소에 스도쿠도, 퍼즐도 좋아하는 나니까!
사람은 로봇이 아니라서 매일 컨디션이 다르다. 어떤 날은 많은 콜도 해낼 수 있지만, 어떤 날은 한 콜도 버겁다. 생리하는 날이라 몸도 기분도 무거울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도 있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때는 동료들에게 힘들다고 말해두면 다른 상담원들이 콜을 땡겨서 받아준다. 참 고맙지. 상담원들 사이에서 대화가 길어질 때에도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상담원이 센스 있게 콜을 땡겨준다. 이렇게 서로 묵묵히 챙겨주는 모습이 참 좋더라.
상담이 끝나는 18시가 다가오면 각자 오늘 받은 콜수를 이야기하고 정리하는데, 그 모습이 참 정갈하다. 시간에 따라 움직인 다는 것이 이렇게도 행복한 일이었나? 나도 하루빨리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상담원이 되어 상담원들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퇴근 후 집에 오면 한 시간 반을 꼬박 누워있어야 한다. 체력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렇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시간이 있어야 운동도 하고, 밥도 해먹을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출근 3개월이 지나고, 6개월이 되면 퇴근 뒤 누워있는 시간이 좀 줄어들까? 조금 더 생기 있는 내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