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아흔넷, 내가 쓴 편지

미래에서 온 편지

by 보라체

내가 벌써 아흔넷이 됐다.


이 나이까지 잘 살아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 없는데 잘 살아있다. 꿀단지는 나랑 같이 아직도 살고 있다. 여전히 나의 어깨와 팔, 다리, 허리를 주물러주고 여전히 웃는 게 예쁘다. 꿀단지가 어떻게 늙을까 늘 궁금해했었지? 너무 멋지고 따뜻하게 여전히 빛나고 있어.


서른둘이었나? 신촌 셰어하우스 처음 들어갔던 게. 그때 갑작스러운 서울행이었지만 이제 보니 참 잘했지 뭐니. 좋은 사람들과 인생도 나누고 눈물도, 감동도 나눴잖아. 꿀단지도 만났고. 잘했어.


연구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고 성교육을 공부했던 것도 그즈음이지? 참 잘했다. 덕분에 돈도 많이 벌고 기대하던 건물주도 일찍이 될 수 있었지. 잘했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덜 헤매며 첫 경험을 받아들이잖아. 어떤 게 폭력이고 강요이고 성차별인지 구별해내는 사람도 많아지고.


그때의 너랑 같은 시대를 보낸 여성들 진짜 대단했지.
흩어져 있었지만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 달랐지만 아름다웠지.


누군가 내게 한 세기를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더라. 고맙지만 난 오히려 한 세기의 변화를 볼 수 있어서 기뻤는걸.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련다. 여전히 지금이 소중해.


2080년 6월 20일,
94세 보라가 34세 보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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