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삶 만들기

서른넷, 콜센터 취직하다

대학원 졸업 후 일곱 번째 직장

by 보라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돈이 없지만 나이는 많았다. 아이는 없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다.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생활을 해왔던 나는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것도 나에겐 어려웠고, 고깃집에서 서빙을 하는 것도 나에겐 어려웠다. 가구점에서 가구를 파는 일도, 추운 겨울에 치마 정장을 입고 백화점 주차장 입구에서 주차 티켓을 뽑아 주는 일도 나에겐 어려웠다. 손이 느리고 어깨가 약해서 택배 포장 일도 다른 사람처럼 빨리 못했고, 힘이 약해서 무거운 것을 들 수도 없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스물여덟, 대상포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나이가 많단 말을 처음 들었다. 늘 막내로 지내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청춘이라던데! 이 아저씨는 왜 나한테 나이가 많다고 하는 걸까? 이번에 일을 구하고 있는 내 나이는 서른셋이다. 시간 참 가혹하지.


사무직은 싫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 웃으면서 인사하는 일이 오히려 나을 듯싶었다. 비록 하루 만에 잘렸지만 그래서 지난여름에는 볼링장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들어갔었다. 유튜브 채널 하나를 운영하는 곳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했다. 즐거웠지만 잠깐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맞지 않아서 나오게 됐다.


이번에는 칼퇴근을 바랐다. 퇴근 이후에는 연락 올 일 없는 조직에서 일하고 싶었다. 출근과 퇴근, 일하는 날과 일하지 않는 날이 구분된 곳을 원했다.


월급이 약속된 곳을 바랐다. 망하지 않는 조직이길, 월급이 밀리지 않는 큰 곳이길 원했다. 연애하면서 미래를 꿈꾸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오늘', '이번 달', '올해' 같은 말들은 이제 조금 지겹다.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처럼 미래를 원해.


열심히 할수록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은 싫었다. 그러면 난 또 열심히 하게 될 테니까. 또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될 테니까. 그 어떤 포상도 없는 곳이길, 혹시나 내게 보상을 주고 싶다면 그저 일 하는 동안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유이길 바랬다.


큰 마음을 먹고 24시간 운영하는 파리바게뜨에 로테이션 근무를 신청했다. 면접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좋아하던 문구류를 잔뜩 만질 수 있는 아트박스에 지원했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공공기관 콜센터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지원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 분야라면 용어야 잘 알 것이고, 전화를 걸고 받는 일이야 하루에 수백 통도 해봤으니 부담스럽진 않았다. 내 목소리나 내 말로 하는 일이라면 잘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문득 원서를 넣은 것이다. 익숙하고 편하니까. 면접장에서는 여성 두 분이 나를 면접하셨다. 많은 얘기가 나왔다.



Q. 이런 스펙으로 왜 월급이 적은 콜센터에 지원하셨나요?

저는 퇴근을 원해요.

직장 생활하면서 한 번도 퇴근했다고 느낀 적 없었어요. 일을 하다 잠깐 멈추고 집에 가서 자고 온다는 생각으로 퇴근해야 했어요. 업무 시간이 끝나면 개인 프로젝트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 프로젝트를 해야 이직이나 승진의 가능성이 생기니까요. 이제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일도 끝나는 진정한 퇴근을 갖고 싶어요."



Q.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이루려 노력해온 것 같은데 여기선 그런 성취감을 갖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이 곳에서 허무를 느끼게 될까 봐 걱정이 돼요.


"취미생활을 가져보려고 해요. 브런치에 글도 쓰고, 유튜브에 영상도 만드려고 합니다. 성공이나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의 창작활동 말고 차분하게 내 얘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하려고요. 혹시 성취감이 필요해진다면 취미생활을 통해서 느끼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6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약속이 지켜지는 직장이 저에겐 처음이에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Q. 여기 연구기관에 연구원으로 원서를 넣는 게 낫지 않겠어요? 모든 사람이 다 그러진 않지만 콜센터에 전화해서 상담원을 무시하거나, 분풀이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과거 경력에 자부심이 있어 보이는데 괜찮을지 걱정이 되네요."


"콜센터는 아직 일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예전 직장생활에서도 무시받는 상황은 늘 있었어요. 비정규직일 때는 비정규직이라서 차별을 받았고, 정규직일 때에도 나이가 어려서, 막내라서, 여자라서 차별을 받았어요. 물론 대부분 국가기 관인만큼 평등한 조직을 위해 노력해주셨지만 그 노력도 결국 정규직 아저씨들이 하는 거였으니까요.


분노한 고객들의 전화를 받다 보면 아무래도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에는 직장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부분을 해소했어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더라도 서로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도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연봉이 천만 원 넘게 낮아지는데 괜찮겠냐는 것이었다. 기존에 내가 받던 월급 실수령액은 280만 원이었다. 여기 실수령액이 얼마난 되냐고 물었더니 연봉 2200만 원, 월급으로는 170-180만 원 정도 될 거라고 알려주셨다. 예전 직장 생활할 때보다 월급이 100만 원 낮아진다.


월급은 생활에 직결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시다고, 면접 때 이런 디테일을 주고받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1년 이상 긴 시간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는 만큼 솔직하게 대답해주신 거라고 하셨다.


"제가 받던 월급은 몇 년 전 과거의 일입니다. 최근 몇 년은 월급 없이 지내왔어요. 그리고 제가 받는 월급이 얼마인지와는 상관없이 저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어요. 늘 몇 개월 단위로 인생이 변화했습니다. 이제는 고정적인 월급을 받고 1년 뒤, 2년 뒤처럼 가까운 미래를 계획하면 살고 싶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출근이 결정됐다. 공공기관 콜센터 업무를 외주 받아 운영하는 회사다. 이 곳 공공기관 직원들과 함께 지내지만 소속도, 월급도 다르다. 나중에 보니 나는 회사 이름도 모른 채 출근을 결정했더라. 어떤 공공기관 콜센터 직원들은 공공기관 소속으로 변화하기도 했다던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나마 잘 되는 걸까?


오랜만에 하는 9시 출근이다. 첫 출근을 앞두고 위가 뒤집어졌다. 밤새 토하다가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겨우 첫 출근 했다. 여기 사람들은 새하얘진 입술로 출근한 나에게 "연락을 주시지ㅠㅠ 아픈데 뭐하러 고생해서 출근했어요 ㅠㅠ"라는 말을 해주었다. 예전 직장에서는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할 때에도 회사에 얼굴을 비추고 허락을 받으라고 배웠는데 여기선 바로 집에 가라고 하셨다. 이런 배려가 얼마만인지 몰라.


12월 23일부터 지금까지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있다. 여덟 번째 직장인데 신입사원 교육은 처음이다. 한 달 동안 교육이 이어질 거라고 안내받았다. 참 이상한 기분.


그간 직장생활에서는 첫 출근 오전 시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인사하고, 오후가 되면 사수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었다. "보라 씨, 이 업무 할 수 있나요?" 이 질문에 답하면 업무가 시작되는 식이었다. 그게 내가 아는 신입사원 교육이었다. 업무를 위한 공부는 개인적인 시간들―휴직기간, 이직 준비기간, 퇴근 이후, 주말―에 공부하고 직장에서는 그걸 쓰기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렇게 소모됐던 걸까.


어쩌면 난 콜센터에 와서 처음으로 노동자로 대우를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나 쉽게 '열심히 일해야지.' 결심하게 되나 봐. 전화받는 일이 고되다지만 아직 안 해봤으니 잘 모른다. 해보면 또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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