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이야기 - 0
4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2월 29일 이었다. 내 나이 스물여덟, 체코 프라하행 비행기표를 들고 공항에 서 있다. 3주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서만 알았다. 유럽 여행이라니, 꿈같은 일이었다.
SNS에 올라온 친구들의 여행 사진을 보며 난 언제 이런 곳에 가보나 부러워하기만 했다. 재작년 처음으로 업무 차 한국을 떠나 중국에 가보기 전까진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외국이란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다. 트루먼쇼처럼 말이야. 나만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봄 즈음 입금되기로 했던 보너스가 구정 전에 들어왔다. 공공연히 돈이 생기면 바로 여행 갈 거야! 했었지만 막상 돈을 보니 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학자금 내야 하는데, 엄마랑 동생 용돈도 줘야 하는데, 생활비도 없고 말이야. 기타 등등. 내적 갈등하다 '남들 부럽다고 시기 질투할 바엔 그냥 한 번 질러보자.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 지 모른다.' 3주 뒤에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국제 체크카드며 여행자 보험도 들고 숙소 예약도 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피어났다. 조심스럽지만 아주 정확하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작년 초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내 삶의 기본 양식인 예배 중수가 어려운 점, 체력적 한계에 부딪친 점, 업무에 대한 회의감 등 이런저런 이유로 전직을 결심했다. 1년여의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도 하고 영어학원도 다니고 나름 바쁘게 살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정말이지 안개 속에 가리어진 느낌이었다. 나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런 백조에게 갑자기 얼마의 돈이 생긴 것이다. 주변 지인에게 체코는 걸어 다니기 좋고,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하기 좋은 곳이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 체코에 가는 거야. 가서 생각해보자.
떠나기 전 3주 동안 여행 준비를 했다. 돈 앞에 무너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보너스로는 비행기표만 겨우 예약할 수 있었기에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돈이 없으니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형편이 안되는데 지금 욕심내고 있는 걸까?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유럽이 다 뭔가. 사치 아닌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 질투가 올라와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왜 이거밖에 되지 않는가, 마음이 쿡쿡 찔려 아팠다. 많이 울었다. 덕분에 들뜨지 않고 차분히 여행 준비를 했다. 나 자신에 대해 묵상하며 예배도 잘 드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다. 떠나기 전 날에는 공동체 사람들에게 따뜻한 기도도 받았다. 주님이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 잘 누리고 올 수 있게 해주시고, 그동안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위로받고 오게 해 주시고, 매 순간 보호하시어 무사히 다녀올 수 있게 해주세요. 최고의 여행 준비를 했다. 나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 속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마주했다. 힘들었지만 곪느니 드러나는 게 백번 감사하다. 3주의 시간을 기도로 채울 수 있었다. 편지도 받았다. 인상 깊은 내용 : 없는 것이 아니라 주신 것에 집중하고 누리다 오세요! 가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고, 느껴야 할 것을 느끼고 와야지. 여행 목표도 세웠다. 그렇게 2월 29일, 4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는 그 날, 체코행 비행기표를 손에 들고 공항에 서 있게 되었다. 비행기 안에 앉아있는데 꿈같았다. 내가 지금 유럽에 간다.
경유지 헬싱키에 도착했다. 오후 3시, 2월 29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담하고 고요한 헬싱키 공항에서 나의 첫 카페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꺼내 일지를 적어 내렸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유럽, 핀란드, 헬싱키,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주문하다니. 가장 말이 안 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아주! 지극히! 엄청!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는 점이다! 자연스러웠다 모든 일이.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되었다. 2주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가 무엇을 보게 될까? 난 어떤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게 될까?
프라하행 비행기에 올라 탈즈음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석양이 아름다웠다. 이 태양이 한국에서도 일고 지던 그것인가. 금세 도착할 줄 알았는데 4시간 연착했다. 프라하 날씨가 좋지 않아 독일 공항에서 대기했다가 프라하 상공에서 두어 시간 또 뱅뱅 돌다가 겨우 기장의 '파이널리.. 위아.. 프라하.. 웰컴..' 목소리와 함께 체코 프라하에 도착했다. 이미 24시간 깨어있던 터라 흡사 좀비 같았다. 감격을 뒤로 하고 ATM 기기에서 코루나를 인출하고 가방을 찾았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라 공항 셔틀 운행을 안 해서 비행기에서 찾아 놓은 플랜 B대로 움직였다. 어리바리할 틈도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 말라스트라나역에 내렸다. 눈 내린 유럽의 밤은 묵직했다. 고요한 도시. 트렁크를 이고 지고 겨우 물어물어 (정말 욕이 나왔다) 예약해 둔 프라하성 근처 호스텔에 들어갔다. 리셉션에 서있는 스텝이 너무 반가워 '하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방키를 받아 들고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한국을 떠난 지 24시간이 넘어가던 그때 프라하의 한 호스텔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내가 체코, 프라하에 있다. 이제야 감격이 몰려왔다. 무려 첫 만남. 내가 너무 대견해 웃음이 나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인지 모르겠다. 내일은 늦잠 푹 자고 일어나서 여기저기 다녀봐야겠다. 감사기도 후에 바로 잠이 들었다.
2016년 2월 29일, 스물여덟, 혼자 유럽-체코-프라하에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