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그 책감, 그리고 구원
파주, 박찬옥
파주는 개인의 죄와 그 책감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식과 은모는 각각 자신의 원죄를 품고 안개 덮인 도시, 파주로 돌아온다. 선배의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중식의 죄는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자신의 원죄, 그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은모의 언니에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갈구하지만 중식은 구원받지 못한다. 닿을 곳 없던 그의 회개와 용서에의 갈구가 은모의 죄와 마주한다. 은모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어쩌면 모른 척 덮어두었던 중식에 대한 욕망과 언니에 대한 질투심, 더 나아가 그녀가 일으킨 사고와 말이다. 중식은 가스배관에 박힌 가위를 보며 은모의 죄에서 자신의 것과 닮은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죄를 품는다.
그런데 정말 중식은 그녀의 죄를 안고 사는 게 마땅한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게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내가 겪어봐서 알아요.’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은모가 중식을 처음으로 형부라고 부르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은모는 환란과도 같아 보이는 비대위 사람들과 연기 나는 건물 사이를 지나 중식을 향해 올라간다. 고통과 분노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제일 위에, 구석지고 위태로워 보이는 그곳에 중식이 있다. 그는 예수가 아니다. 중식은 ‘왜’ 이 일을 하냐는 은모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글세,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했던 거 같고, 그다음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 역시 너무나 용서받고 싶은 연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은모 역시 중식에게서 ‘사실은 너를 사랑한 거야.’라는 진실을 들었을 때 과거 자신이 품었던 죄의 감정과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마주하는 그 순간,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진다. 은모는 중식을 비대위로부터, 중식은 은모를 그녀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해준다. 두 사람은 그제야 죄로 덮여있던 도시, 파주를 떠난다.
박찬옥 감독은 중식과 은모를 통해 안개는 언젠간 걷히고, 그 속에 덮어뒀던 죄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말하고 있다. 비대위와 인도는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 오직 ‘직면’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폭풍처럼 밀려올 것 같은 고통은, 마지막 어쩐지 평온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우리를 위로해 준다.
이상 박찬옥 감독의 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