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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tudio Feb 01. 2017

boy A

에릭이 에릭으로서 사랑받지 못했을 때 ‘Boy A’

boy A. John Crowley



영화가 시작되고 소년 A, 그러니까 우리나라 버전으로 하면 김군이 아버지 같은 존재인 테리와 시작한 대화는 이러하다. 


Terry: How do you feel?

Jack: Oh, I don't know. Just like I'm having a dream. 


누군가에겐 지극히 평범한 오늘이 그에겐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하루이다. 김군은 태어나 처음 설레어 보는 표정으로 말한다. ‘잭. 잭이 좋겠어요.’


‘Boy A’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을 주는 (것 같은) 테리의 도움으로 세상에 한발 한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잭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잭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건장한 청년이 스파이시 치킨 하나 고르는데 그토록 긴 시간과 두려움이 필요한 것일까? 


소년 A, 에릭이 Jack Burridge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다. 그는 여전히 에릭과 필립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잭의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다. ‘필립은 정말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잭의 질문에 테리는 답한다. 

‘잊어버려. 넌 이제 더 이상 에릭이 아니야.’ 

잭은 고개를 끄덕인다. 테리와 함께한 시간 동안 수천번의 끄덕임이 있었으리라. 난 에릭이 아니야. 그래, 난 더 이상 에릭이 아니야. 그 악마 같은 소년 A는 이미 죽었어.



잭은 세상에 나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로움을 자극시킨다. 그는 범죄자이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오토바이를 훔쳐 3년 복역한 잭'은 ‘편견을 갖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듯 보인다. 


죽어버린 필립, 테리 밖에 없던 잭의 세계에 서서히 켈리(집주인), 크리스, 미셸이 들어오게 된다.

특히 미셸. 미셸. 흰고래 미셸. 기다랗고 위태로운 육체를 가진 잭은 미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터트린다. 

‘Do you love me?’ 그의 물음이 가슴 아팠다. 

그게 그렇게 받기 힘든 거였나? 세상천지 널리고 널린 게 사랑노래 사랑타령인데. 

그러나 잭은 몸을 떨며 운다. 왜,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된단 말인가. 

60억 인구 중 단 한 사람에게 사랑받은 잭은 변하기 시작한다. 많이 웃고 감정을 표현하고 (아마) 태어나 처음 받은 생일선물에 ‘Thank you’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이쯤에서 에릭과 필립 이야기를 해 보자. 



에릭의 엄마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아빠는 그를 방치했다. 에릭은 사람들에게 ‘어이 냄새나는 바보!’ 혹은 ‘에릭! 엄마에게 말 걸지 말랬지!’ 혹은 ‘에릭! 너 숙제는 한 거니?’ 등등으로 불렸다. 에릭은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경멸감을 주거나 귀찮게 되거나, 부정을 당했다. 에릭의 떡진 머리칼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필립. 친형에게 강간당한 어린아이. 그는 자신의 단짝 친구에게 말한다. 

‘난 분노하는 걸 좋아해. 형에게 강간당할 때 수많은 방을 떠올려. 방문이 하나씩 닫히고 모두 닫힐 때까지 내가 울지 않는다면, 나는 전혀 울지 않은 것이 돼.’ 

헤르타 뮐러 소설이었나 해설이었나. 여하튼, 거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울지 않으면 괴물이 된다.’ 울지 않은 소년 필립은 괴물이 되어갔다. 하얗고 작은 몸에 가득가득 분노를 채워갔다. 


이런 두 소년이 만났다. 여기까지는 사실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훔친 것이지만 함께 콜라를 나눠먹고 서로를 위해 싸워주고 서로를 최고의 친구로 인정해 주었다. 서툴지만 그렇게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의 십 대가 그러했듯이. 가장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 온몸으로 상처를 받아내고도, 결국 성장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듯. 

그러나 세상이 좋아하는 인간으로 대변되는 안젤라는 그들을 조롱하고 비난했다. 찌질이 너희 둘이 거기서 뭐하니? 너희는 둘이 모여봤자 쓰레기야. 낙오자야. 에릭과 필립은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하여 악마 탄생.



필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에릭은 잭이 되어 세상에 다시 나왔다. 꽁꽁 숨기려 해도 불쑥불쑥 에릭이 튀어나온다. 친구를 지키려 분노로 분노를 밀어낸다. 그러나 이전과는 판도가 많이 바뀌었다. 잭은 비난받지 않고 ‘떡대남’이 되어 그들의 의로운 친구가 되었다. 안젤라 밀튼을 살해했던 그 작은 칼로 위험에 빠진 소녀 캐서린 톰슨을 살려내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잭’이 되었다. 


여기서 이제 테리. 오, 테리. 제발 테리.

우리는 테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는 실패한 가정을 뒤로하고 자신의 위대한 업적, ‘잭’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애석하게도 테리에게 에릭은 없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인정해서는 안되고 부정해야 할 존재이다. 테리는 끊임없이 말했을 것이다. 

‘넌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이젠 아니야. 내가 널 잭으로 만들어 줄게. 우리에겐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물론 조금 힘들 순 있겠지. 그렇지만 다시 말할게. 넌 더 이상 에릭이 아니야. 알아들어 잭?’



오, 퍽킹 테리. 

우리의 실수가 테리에게 있다. 잘못된 자기 사랑의 결론이 테리에게 있다. 그는 잭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잭을 갱생시켜 자신의 인생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혹은 그러기 위해 무던히 애쓴 것이다. 


‘my son’은 잭이 아니라 몇 년간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아들에게 했어야 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아들은 사랑이 아니라 경멸을 보았을지 모른다. 


‘넌 내 실패의 결과물이야.’ 

(과거 에릭과 필립이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눈빛도 이와 같으리라)


결국 사랑받지 못한 아들은, 또 다른 사랑받지 못한 아이, 잭을 고발하고 만다. 

‘A monster, Da. A monster over me!' 여기저기에서 괴물이 잉태된다.  

아, 테리. '지금은 좀 상황이 어렵겠지만 잘될 거야 아들아.’

술 취해 중얼거린 자신의 말에 아들이 슬며시 미소 지었던 걸 그가 좀 더 일찍 알아채 주었더라면. 


에릭, 필립, 테리, 테리의 아들, 살해당한 안젤라는 모두 그들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았어야 했다. 

에릭은 잭이 아니라 에릭이 되었어야 했고, 필립은 울었어야 했고, 테리는 위대한 업적 잭이 아닌 실패한 가정으로 돌아갔어야 했고, 그의 아들은 아빠에게 사랑의 눈빛을 받았어야 했고, 안젤라는 인정이 아니라 사랑을 받았어야 했다. 사실 누구도 이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에릭, 필립, 테리, 그의 아들, 안젤라의 모습이 모두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잭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니, 에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열다섯, 열여섯에 머물러 있는 어린 소년 에릭. 

사랑하는 미셸도 없고 크리스도 없다. 테리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악마라 부른 소년 A의 마지막 시간을 채운 말들은 이러하다. 


미셸에게는 I love you. 

테리에게는 I can't go back. being that other person. because that other person is dead. 

Remember you said that? Anyway, sorry I let you down. Thank you for trying, Terry.

크리스. It's Jack. It was always Jack. / You remember that girl? Remember we saved that girl, mate? You remember that.


에릭은 미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테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크리스가 그들이 함께 구해주었던 소녀를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자, 이 소년이 이제 세상의 끝, 세계의 끝에 매달려있다. 추락 직전이다.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Boy A, 김군, 김양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 있다.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단 한 명이라도 잡아주길 바라며. 

이상 John Crowley 감독의 Bo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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