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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래 Jan 30. 2024

11월의 통영 (1)

동아시아 남부 작은 바다 마을 여행기 23.11.07~09


여행으로 간다면 어딘들 안 좋겠냐마는, 언젠가부터 유독 남부 지역에 더 설레곤 한다. 북부는 '도시, 내륙, 산업화' 같은 단어가 먼저 연상되는 반면 남부를 떠올리면 '해변, 태양, 여유' 같은 것들이 통통 튀어나오기 때문인데, 나만의 선입견일 망정 '남부'라는 단어가 주는 그 느낌이 참 좋다. 따뜻하고, 법석거리고, 맛에 대해선 열정이 남다를 것 같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좌) -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우)
튀르키예 남부 페티예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남부, 튀르키예 남부. (크흐~~) 지중해성 기후에 대한 환상이 더해지기도 했을 테지만, 동아시아 작은 나라의 남쪽 해안지역들은 또 어떠한가. 부산, 통영, 남해, 여수, 목포. 지중해 프리미엄(?)을 빼더라도 남부 해안 지역은 그 자체로 아주 매력적인 키워드인 거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시간과 돈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게 없는 K-직장인! 게다가 이젠 놀고 오면 쉬어줘야 하는 나이가 되어 (ㅜㅜ) 여행 한번 갈라치면 자꾸만 이리저리 재게 되는 중년의 직장인이 아니던가. 교통수단이며 이동 시간, 그 지역에 가성비 좋은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지 등등 몇 번의 질문에 yes, no 답을 하다 보면 애초에 선택지가 두 개뿐이었던 것처럼 결론은 제주도 아니면 강릉/속초였다. 지하철과 비행기로 총 두 시간이면 일상을 벗어날 수 있고, 차로 쏜들 역시 두 시간이면 바다 마을에 닿을 수 있는 이들의 접근성과 가성비를 무슨 수로 뿌리칠 수 있겠냐구.


핑계가 풍년이던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퇴직을 해 시간 여유가 있을 때였는데 마침 대한민국 숙박 세일 페스타를 해서 1박에 3만원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던 것이다. 물론 행사에 참여하는 숙박업소에 한한 건데 정부 지원금을 받는 거라 그런지 웬만한 곳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왠지 구린(...) 인상과는 달리 짜치지 않고 꽤 괜찮았어서 다음 행사도 애용할 예정이다.


할인 좋앙 >_<


단박에 통영이 물망에 올랐다. '남도 음식' 하면 전라남도 음식을 일컬으며 대개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다는 통설 같은 게 있는데, 통영만큼은 언제나 맛의 도시로 소개되는 게 늘 궁금했다. 뭐지, 왜지, 진짠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통영 땡땡이(애청자)분이 소개해준 숙소를 검색해 보니 모두 페스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혜택은 1인 1회 한정이라 우리는 각각 1박씩을 맡았다.


그란데호스텔 객실에서 본 통영대교


첫날은 모든 방이 바다뷰에다 통영대교 야경을 방에서 편히 감상할 수 있다는 그란데호스텔. 1박에 8만원 정가인데 할인받아 5만원에 예약했다. 둘째 날은 통영의 고급 호텔 쌍두마차 중 하나인 스탠포드 호텔. (다른 하나는 금호통영마리나리조트 라고 한다) 당시 쏘카 앱에 올라온 '객실 랜덤 배정'인 옵션이 가장 저렴해 할인가 6만 9천원에 예약했는데, 아직도 우리보다 저렴하게 이용한 후기를 보지 못했다. 후후후.


무직자의 특권을 한껏 땡긴, 무려 화요일! 아침 느지막이 직접 만든 바게트에 버터를 두툼하게 넣은 잠봉뵈르를 하나씩 만들어 먹고 어슬렁 출발했다. 버터의 열량 때문인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중간에 금산휴게소에 들러 핫도그를 하나 사 먹고는 통영까지 내처 달렸다.


금산휴게소 여자화장실에는 무척 숭칙한 인삼 조형물이 있다. 이거 말고도 남사스러운 인삼들이 즐비하다. 충주 못지 않은 컨텐츠가 있는 금산. 충청도의 B급 유머 너무 좋다!


역시 서울에서 가기엔 빡센 거리다. 게다가 우리 집은 북한 가까운 곳에 있어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만도 시간이 꽤 걸린다. 5시간을 꼬박 달려 통영 그란데호스텔에 도착했다. 이름에 호스텔이 들어가지만 도미토리는 없다. 콘도형 숙박시설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11월 비수기에 평일이어서인지 몹시 조용했고, 방 안에서 본 통영대교는 듣던 대로 시원스레 펼쳐졌다.


해가 기울어 가는 아름다운 오후 4시 46분


침대에 널브러져 자동차에 구겨져 있던 몸을 펴주고 있자니 버터의 기운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급격한 허기가 몰려왔다. 통영에서의 첫 식사는 다찌집에 가려고 벼르고 벼러 골랐다. 상다리가 부러지고 턱주가리가 빠져나가는 어마어마한 곳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언제나 이놈의 비루한 주량과 식사량에 발목이 잡힌다. 용가리 같은 콧숨을 뿜어내며 선택한 곳은 북신시장 안에 있는 반다찌 '술따라길따라'. 지도엔 숙소에서 3.8km, 58분 거리라고 나오지만 얼마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온 우리에겐 아직 걷부심 허세가 남아있었다. 배는 좀 고팠지만 통영 골목들을 구경하며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충무교를 건너 윤이상 기념공원을 지나고 통영항을 스쳐 서피랑길로 접어들었다. 리모델링한 지 5년 남짓 지난 윤이상 기념공원은 매우 세련되어 보였지만 구석구석 감상하기엔 윤이상 님과 어색한 사이라 외관만 스윽 둘러보고는, 패스. 서피랑길로 가는 골목엔 작은 상점과 음식점이 간간이 보였지만 전반적으로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99계단 입구를 지나쳐 갔다가 되돌아와 보니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곳에 작은 길이 나있었다.



막상 그 앞에 서니 솔직히 '애걔, 이거야? 아주 할 수 있는 최대한을 그러모았구먼.' 껄껄 헛웃음이 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금세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드는 거다. 묘하게 생뚱맞은 벽화와 천덕꾸러기 같은 조형물깨나 봐 왔던 것 같은데, 이 계단을 오르면서는 구석구석 애정의 손길 눈길이 담뿍 느껴졌다.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달동네 골목길이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가 된 비결. 누군가의 정성, 그것이 빚은 괜찮은 만듦새가 느껴졌다. 그렇구나, 뛰는 '냉소' 위에 나는 '정성'이 있었구나.


꼭대기에 있는 서포루에 올랐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붉게 물 들어가는 하늘 아래로 강구안이 내려다 보인다. 파도가 적고, 든든한 뒷배처럼 육지가 감싸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바다는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통영의 강구안은 주인 품에 안긴 강아지처럼 양양하고 안정적인 인상이었다.


앨범을 열 때마다 놀래키는 하얀 엉덩이 그리고 서포루
서포루에서 내려다본 해질녁 강구안


아...! 배가 고파 죽겠다. 죽을 때 죽더라도 다찌 상은 받아 보고 죽어야지. 서둘러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 박경리 생가 표지판이 히죽 웃는다. 아오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이 길을 언제 또 오겠나 싶고 ㅋㅋ 뭐 별 거 있겠나 싶다가도 별 거 있으면 어떡하나 싶고. 박경리 선생님은 어떤 골목을 매일 같이 드나들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자꾸 잃으면서도 도박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호구처럼, 눈에 초점을 잃고 마이프레셔스를 읇조리는 골룸처럼 골목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마주한 반전.


...은 없었다. 생가에는 다른 분이 살고 계신데다 100년이 된 집이라기엔 최근까지 보수하며 살았을 법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젠 터만 있는 다른 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골목도 예전의 그 느낌이 지워진지 오래일 거다. 그럼에도 여전한 건 울퉁불퉁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이라는 것. 골목을 닮은 울퉁불퉁한 삶을 사셨겠으나, 그 또한 오랜 세월 곧게 뻗어 나갈 명작들을 많이 남기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을 테다. 자양분... 이젠 진짜 내 몸에 자양분을 집어 넣을 시간이다. 제발 가자, 다찌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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