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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드웬디 Sep 26. 2024

먼 길 조문도 추억이 됩니다

친구의 아버지께서 지병 끝에 돌아가셔서 안성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경사에는 축하와 축의금만 하더라도, 조의를 표할 때에는 가능한 직접 가서 위안을 드리는 분들을 본받고 싶었어요.


퇴근 후 빨간 광역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안성으로 갔습니다. 

3년 전 안성의 작은 아파트를 낙찰받아 꽤 공을 들였던 적이 있어서, 더 애틋한 곳입니다. 




안성 시내버스에서 내리니 벌써 어둑어둑 해졌습니다.

외국인 근로자가 많아서인지 러시아 전문 상점, 할랄 음식점 등 특색 있는 가게들이 제법 보입니다.


약한 마음먹지 않고 꼭 살겠다는 의지를 단단히 굳히니 모든 것이 좋은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겁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작년까지만 해도 어두운 길이든, 인기척 없는 곳이든 

'그래, 차라리 누가 나타나서 한 방에 처리해 주고 가면 편하겠다.'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무서울 게 없었는데,

요즘 어두운 길을 지날 때면 나쁜 사람이 있을까 겁이 납니다. 

정상적이니 오히려 좋은 거겠지요?



아버님께서 지병으로 1년 동안 너무나 힘들어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친구의 얼굴에서 그간의 마음 고생과 더 하지 못한 효도의 아쉬움이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25년 지기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노안과 불면증,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노화의 징후를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는 고충을 나누기도 했어요.


친구들보다 조금 빨리 아이를 낳은 편인 제가 

"아이들 사춘기는 그 나이에 있는 대로 폭발하게 지켜봐 주고, 우리는 사십춘기 잘 보낼 수 있는 게 좋겠다."라고 하니

"그래, 이렇게 살아가는 게 고마운 거지."라면서 받아줍니다.


서로 자세한 사연을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친구들입니다.


요즘 글쓰기 덕분에 산다는 말에도,

"뭐니 뭐니 해도 글을 쓰는 능력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라고 '네 마음 다 안다'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대답해 줍니다.


과연 속이 꽉 찬 제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과 함께 했던 젊은 날이 더욱 아름답게 기억됩니다.  




오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몰랐습니다. 

광역버스가 끊길까 봐 서둘러 나섰는데, 초행길을 헤매다가 그만 막차를 놓쳤습니다.


다행히 평택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용산역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평택역까지 가는 동안에 네이버 지도를 보며 안성 낙찰받은 집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버스 막차가 끊겼어도, 그때 가격을 비교했던 아파트 단지 이름들이 낯익어서 당혹감이 덜했어요. 


이 와중에도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서 '오히려 좋아' 하는 제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납니다.


자신만의 근사한 서사가 있는 삶이 진정 성공이라는 말씀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지금은 모두 아름답고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저만의 서사가 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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