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최태성, 다산초당
역사의 쓸모 (최태성)
2019년 07월 24일 XINSHA, CHINA,
ANCHORAGE에서
직업 특성상, 하루 세끼 모두 직장 상사들과 함께한다. 삼시세끼를 같이하다 보면 그분들이 살아온 장엄한(?) 과거를 외울 정도로 많이 듣는다. 역사를 잘 모르는 탓에 하늘하늘 날아가버릴 듯한 '얇은 귀'를 가지고 '아~그렇구나'하며 듣고 있다. 하지만 '정말 지금 말씀하시는 스토리들이 정말 사실일까?', '짙은 색깔에 가려진 역사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역사 관련 책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와중에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사의 재미를 알려주신 최태성 선생님이라 믿고 책을 구매하고 읽게 되었다.
‘구진천’이라는 인물을 아는가? 그는 신라 문무왕 시절에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여러 무기 중에서도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당시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전쟁을 하였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나·당연합을 이루고 전쟁을 치르던 당나라 군사들 조차 그의 쇠뇌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당나라는 어벤저스급 무기를 만들어낸 인물이 ‘구진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 고종은 계속해서 신라에게 그를 당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계속된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던 신라는 그를 당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에 간 구진천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완벽한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그가 만든 병기가 신라와 신라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력에 맞는 병기를 만들어내고, 기술을 전했다면 좋은 대접을 받고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탄탄대로를 택하지 않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내가 ‘구진천’이었다면, 목숨이 달렸기에 그와 같은 선택을 하기란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병기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생각해본다면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지금 닥친 상황과 욕망에 자꾸 눈이 멀어요. 그래서 과거의 무수한 사례를 까먹고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입니다. 그 잘못 하나 때문에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공이 무너지기도 해요. 내가 내뱉는 말과 지금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살펴볼 수 있다면 선택은 한결 쉬워질 겁니다.”
<역사의 쓸모>, 최태성, 다신초당
앞으로도 업무에서든, 관계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로 인한 책임을 지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였을 때, 나의 선택이 주변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한번 더 생각해본다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약용, 그는 자신의 생가에 ‘여유당’이라고 쓰인 현판을 걸어놓았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뜻이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었던 그의 집안. 이를 트집 잡아 정조 라인인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즉,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가에 ‘여유당’이라 적힌 현판을 걸고 매일 아침 다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약용은 조정에 돌아가지 못했다.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던 ‘신유박해’, 정약용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를 간 그는 나라를 탓하지 않았고,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일을 많이 하였고,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썼다. 정말 대단하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말이다. 500여 권의 많은 책을 쓴 이유는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아들들에게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남겼다고 한다.
그는 역사를 알았기에 고난을 버티며 투쟁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정약용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유배를 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다면 현재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힘든 세월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며, 책을 500여 권이나 썼다.
한번 쓰러졌다 하여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M/V SAI에 승선한 이후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많았고, 달력을 보며 ‘휴가가 언제 올까..’하는 생각에 잠긴 적이 많았다. 이렇게 비난 가득하고 암울하게 이 시절을 보낸다면 미래에 이때를 돌아보았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럴 자신이 1도 없다. 그리니 지금 이 힘든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을 찾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자. 그러면 힘든 순간이 성장의 순간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독립운동가 박상진. 판사 시험에 합격하고 평양 법원으로 발령까지 받은 그는 사표를 던진다. 그때가 바로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해이다. 일제강점기에 판사로 일한다면 불령선인을 재판하게 된다. 불령선인이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 즉,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박상진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영웅인 그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였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박상진, 그의 꿈이 판사였다면 어렵게 합격한 판사라는 직업을 내팽개치고 나올 수 있었을까?
‘나의 꿈은 무엇인가?’ 요즘 이 고민에 빠져 있다. 언제나 나의 꿈은 직업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체성이 흔들리고, 계속해서 주변에 휘둘리게 되었다. ‘이것 해볼까.. 저것 해볼까.. 이건 어떨까..’
꿈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꾸는 것입니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그 힘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든요.
최태성 선생님의 조언이 꿈을 꾸는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는 명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동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요즘 ‘독서를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정말로 성장하고 있는 게 맞는지 체감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꿈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그런 찰나에 ‘역사의 쓸모’에서 많은 위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위인들은 나의 멘토가 되어주었고, 자기 효능감을 향상 시켜주었다. 나와 세기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위인들이 나의 고민을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감을 해주었고 조언을 해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은 밑줄을 새겼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역사가 위대하고 소중한 것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해 준 최태성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