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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부커 Sep 17. 2024

그래요.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유무상생’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는 법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온전하게 정신과 신체가 발달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는 여러 위험요소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긍정적 작용을 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부모가, 교사가, 사회가 일정 부분 교육시키고 주입했다.


‘사피엔스 종’ 인간으로서 가진 근원적 두려움과 불안도 있었겠지만 사회화 과정 속에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원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부정적으로 점점 확장된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24시간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자본주의의 알을 품고 낳는 닭 신세가 바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안의 진짜 생각과 정수가 담긴 알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안으로 빠르게 진입하기 위해 어떤 닭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규격화된 알을 낳는데 특화되는 닭말이다. 인간성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다는 두려움이 책더미에 깔린 지우개 마냥 나를 짓눌렀다.


1980~1990년대, 시절을 돌아보건대 다른 생각과 다양한 가치가 썩 유쾌하게 수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손들 때 같이 손들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웃을 때 웃고 또래 아이들과 똑같은 생각과 태도를 보이면 어른들은 안심하는 것 같았다.

또래들과 헤어지고 나면 나는 왜 다를까? 내가 이상한 건가? 이런 의문들이 성장과정에서 가끔씩 나를 흔들었지만 어른들은 진지하게 받아주지도 답을 주지도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동네 어른도 답을 알아도 몰랐던 것이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렇다. 남들 아파트 살 때 아파트 사야 되고, 남들 승진하면 승진해야 되고 고급차 사면 사야 되고,  해외여행 가면 어떡하든 남들 다녀온 해외 여행지를 꼭 한 번쯤은 다녀와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안해한다. 아이러니하다. 오직 한 번뿐인 내 인생이다. 왜 나는 내 삶의 가치관과 속도로 살지 못하고 아직도 남들 사는 모습을 흘깃흘깃 곁눈질해 가면서 흉내 내며 살아야 하는가?

왜 아직도 남들과 다른 생각과 다른 가치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걸까? 왜 나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생각이 사회의 일반론보다 더 존중받지 못하는 걸까?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똑같은 생각을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확장하는 과정이 아닌가?


어느 공무원 연수 시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나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강사님이 묻길래 나 솔직하게 나의 삶의 목표는 사무관이 아니라 도서관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그 순간 주변에서는 웅성웅성 대며 다소 특이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 자녀를 키우는 마흔 살 넘은 아빠지만 아직도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과 조금만 다르면 두렵고 불안해지는 사회다.


자기의 고유성과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세상에 외모나 체형이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다. 또한 모든 사물과 현상을 똑같은 관점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재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팅된 질문에 대한 답만 도출해 내는 기계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공부하는가 등 사유하고 성찰하면서 자기를 찾아가는 귀한 존재이.


하지만 내가 학창 시절부터 사십 대 현재까지 경험한 우리 한국사회는 획일화된 시험으로 등수를 가리고, 그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고 줄 세운다. 시험점수가 곧 그 사람의 예비적 신분 등급이 된다. 점차 고유성은 무시되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깎여나간다. 시험등수가 대표성을 갖고 모든 사회 교환가치로서 우선 작동하기 시작한다. 시침과 분침 초침까지 우열을 매긴다.


이런 사회 구조, 메커니즘 속에서는

등수 밖으로 밀려난 자들은 패배의식과 실존적 공허에 허덕이게 된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두려움이 자신을 집어삼킨다. 트라우마가 깊으면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각자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분명하게 있다. 각자 그 소명을 삶의 다양한 경험과 도전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재능을 찾아서 꾸준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자기가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1등이 될 수 있다. 나는 분명하게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겪어온 우리 사회는 각자의 기질을 고려한 맞춤형 교육보다는, 시험 1등을 위한 교육에만 중점을 두고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열외 시킨다. 긴 호흡으로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는 곧 성적 좋은 smart student=good student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욕을 하면, 용맹함도 갖췄구나.라고 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가 욕을 하면, 역시 너는 구제불능이라는 공식으로 치환된다.


이런 경쟁, 비교, 우열 문화 속에서는 불안감은 증폭되기 마련이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이들을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서서히 잠식해 간다. 사회시스템이 두려움을 확대 재생산한다.


국영수도 좋지만 초등학생부터 자기를 찾는 철학교육도 필요하다. 자기 삶의 주체적 의미를 알면 어떤 시련도 이겨내는 법이다.


여건이 된다면 경제교육(돈의 원리, 재테크, 주식

부자마인드, 부동산)도 빨리 시작했으면 한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린 나에게, 주변 친구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당신은 오직 단 하나뿐인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꼭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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