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꺼내다 손을 베일 때

나의 쇠스랑을 떠나보내줘야 할 때

by 브리사
열여섯에, 그 파란 대문집 마루에 앉아 오빠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내 발바닥을 쇠스랑으로 찍어버렸던 열여섯에, 나는 생은 독한 상처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독함을 끌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결한 한 가지를 내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그걸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너무 외롭겠다고.

- 『외딴방』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쇠스랑에 발등을 찍어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외가댁 냇가에서 놀다가 무언가 기억나지 않는 것에 발을 찧어 다친 기억이 떠올랐다.

크면서 한동안 그 자리를 쓰다듬으면 그때의 아픔이 떠올라 선득한 적이 있었다.


아픔은 추억이 되지 않는다.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몸에 남은 상처들은 가끔 마치 그때처럼 아픔을 떠올리기도 해서, 마음보다 몸이 더 정직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약을 받는 것이 처음에는 좀 낯설었다.

한국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복용 시간까지 적힌 하얀 작은 봉투 안에 색색의 알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약국에서 약을 박스째 받아와서 내가 분류하고 관리해야 한다.

매일매일 남편의 약을 분류해서 챙겨놓기도 하고, 여행을 가거나 내가 장기간 부재할 때는 몇 주치 약을 미리 만들어놓기도 한다.

주방에 홀로 앉아 단조로운 약 만들기 노동을 할 때가 내가 가장 집중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 약이 섞이거나 빠지게 되니까.


말랑한 약 하나를 꺼내기 위해 플라스틱을 뒤집고 검지로 눌러 꺼내면 약이 튀어나오고, 가끔 그 얇고 뻣뻣한 포장 모서리에 손을 베이기도 한다.

늘 같은 부분이 베이는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그 느낌과 아픔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처음 약을 꺼내다 손가락을 베이고 나서는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상처의 아픔보다는, 내 안에 침전되어 있던 어떤 마음의 분노였으리라.

몸의 고통이 마음의 기억을 데려오는 정직한 방식으로.


어느 날은 약 하나를 제대로 못 깐 나의 부주의함을 탓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다칠 것 같아 유난히 조심스레 약을 뜯다가도, 싸악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을 베이고 나서는 그것조차 피하지 못한 내 불운에 항거하듯,

작은 조개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살에 약조차 바르지 않고, 물로, 휴지로 쓱 닦아버리기도 했다.


손에 난 상처가 아닌, 마음에 난 상처였으리라.


매일 약을 만들면서 저릿하게 느껴지는 손가락이 베이는 통증은, 정작 베이지도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건 왜일까.

본능인 것이겠지만, 이 사소한 통증에 커다란 의미나 연민을 덧씌우지 말고, 그냥 연고와 밴드나 좀 더 구비해 놓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부분을 다시 베이게 될 테지만, 이제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상처가 아닌 시간의 흔적으로 기억해 보면 어떨까.

마치 친구에게 조언하듯, 나에게 그렇게 얘기해 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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