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

서울대생의 쓸모, 그 굴레

by 브리사

나는 서울대학교에 가본 적이 없지만 남편은 그 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지금 사고 이후 사지마비 장애인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지마비 장애인이라고 하면 누워서 움직일 수도 없고 눈만 껌벅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처음 다치고 의사에게 진단받을 때 의사가 아이를 바라보며 한 말을 번역해 보자면, “너의 아빠는 이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였으니.


다치기 전 그는 운전을 누구보다 좋아했고 잘했고, 기계 역시 잘 만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친구가 조립해 준 나름 첨단 장비들을 스틱을 물거나 머리로 터치를 하거나, 아니면 눈을

깜박이는 방식으로 여러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은 덕에 지금은 노트북과 스마트폰, 태블릿을 혼자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십 년을 훌쩍 넘게 산 부부답게 칭찬에 인색한 나는 “대단하다” 흔한 말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나라면’이라는 말의 허상은 허무해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장비들을 세팅하는 데 우여곡절과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것들을 쓰는 데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그 장비들이 남편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다.


그 첨단, 낯선 장비들로 그는 주로 유튜브와 예전 드라마, 영화를 본다. 가끔 아이들 학교에 메일을 쓰거나, “너무 신기하지 않냐”면서 대화형 인공지능의 장기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책 좀 읽어. 음성으로 글을 좀 써봐. 당신의 경우 머리로 생각한 걸 행동으로 바로 할 수 없는

인지 부조화 상태이기 때문에 치매에 걸리기도 쉽대. 자꾸 쓰고 읽어야 해.”


어찌 보면 다른 곳은 다 다쳤지만, 당신이 정말 잘할 수 있는 머리는 다치지 않았잖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 할 수 있을 거야.


원래 당신이 준비하려고 했던 MBA이나, 아니면 여기에서 스페인어로 대학원을 다녀볼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다 할 수 있어. 수업 시간에 옆에 가서 같이 서 있을게. 내가 받아 적거나 녹음하면 되잖아.


고등학생 아이였다면, 방문을 닫고 뛰쳐나가고도 남았을 거다. 다치기 전부터 나의 잔소리에 익숙한 남편은 늘 “알았어” 하고 사람 좋은 얼굴로 대답하더니,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하고 싶지. 근데 네가 말하는 그런 것들을 하려면 집중을 해야 하고, 집중을 하려고 하면 정말 미칠 것 같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 몸의 아픈 감각이 더 심하게 살아나.

매일 나를 제일 가까이에서 보는 너도 상상조차 못 할 거야.

내가 이 영화를 좋아서 보고 있는 게 아니야.

지금 그냥 아프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야.”


나 역시 그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에 대한 집착에 대해 항변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남편은 환자가 아닌, 장애인이 된 그저 다른 아빠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그가 어떤 위치에서든 본인이 자긍심과 만족을 느끼면서 살기를 바랐다.


아이들과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가, 아니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라고 했다가, 결국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고도 했다. 내가 그에게 한 말들은 그만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나 보다. 나의 욕심이 투영된 바람이었을까.


최근에 다치기 전에 함께 일했던 현지 동료가 회사를 옮긴 후, 그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하자며 조심스러운 제안을 했었다. 우리에게도 행운이 굴러오다니, 정말 기다렸던 바였고 남편 역시 매우 고양되었다. 하지만 늘 나의 생각과 기대보다 세상은 너무나 많은 변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이번 일 역시 결국 어이없이 틀어지게 되었다.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박완서



맥락도 의미도 다른 한 대담집에 나온 문장이지만, 나는 벼락을 맞은 듯 내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저 문장이 나에게는 이렇게 읽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당신의 시간도 중요하다고.


서울대 나온 장애인의 '쓸모'에 관한 나의 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의 다른 세계가 펼쳐지길 바라본다.

목요일 연재
이전 06화마드리드에서 맞은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