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억을 기억하는 법
오늘 오빠 놈에 관련된 훈훈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고 한다. 사실 내 지인들은 알겠지만 우리 오빠와 관련된 에피소들 중에서 훈훈한 에피소드를 찾기란 가뭄에 콩 나는 수준. 그래서 이 글은 오빠와 관련된 최초이자 마지막 일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내가 첫 사회생활, 그러니까 돈벌이를 시작한 곳은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큰 회사의 아르바이트였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마인드로 호기롭게 첫 출근을 했지만 나의 능력 부족 + 처음 겪는 진짜 사회 + 일을 잘해도 너무 잘했던 전임자 3단 콤보로 세상 지질한 루저가 되어 대구로 귀향(?)한 무렵이었다.
그렇게 낙심한 마음으로 내려간 고향집에서의 삶은 유배지에 유배 온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엄마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해가 똥꾸멍까지 뜰 때까지 늦잠 자다가 일어나 배고프면 차려준 밥 안 먹고 찬장을 뒤져 라면을 끓여먹다가- 배가 꺼지지도 않았는데 다시 누워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봤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이라고 집에 내려온 오빠 놈이 거실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내가 한심해 보였나 보다.
백수처럼 그라고 누워있지 말고,
책이라도 좀 읽던가- 영어라도 좀 하던가...ㅉㅉ 뭐하노?
하고 툭- 던지는 거다. 떡진 머리를 하고 깔깔거리며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나는 이성이 뚝-하고 끊겼다. 뭐라고? 지금? 니가? 나한테?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울며 대들었(던 것 같)다. 사실 여기서부터 정확히 기억이가 나질 않는다.
오빠야가 뭘 아는데???!!!
니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
(나 많이 힘들었다며- 묻지도 않은 소리를 해댔던 것 같다.)
시점의 문제였다. 평소라면 반도의 흔한 오빠의 잔소리. txt 일수도 있지만, 무려 루저병 말기에 걸려있는 동생에게만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마치 남자 친구에게 갓 이별통보를 받은 여자에게 '남자도 안 만나고 집에서 뭐하냐.' 정도의 뎁스였겠다. 나는 한참을 나라 잃은 사람처럼 쏟아내며 울었다. 오빠 놈도 지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도 그렇게 까지 울 정도의 잔소리는 아닌데 하고 머쓱하던 중, 꺽꺽거리며 울고 있는 우는 내게 이내 이런 말을 했다.
야.
그때 - 니가 힘들었던 일들,
처참했던 니 마음, 무시당한 기억들.
하나도 잊어버리지 말고
가슴속에 꼭꼭 묻어둬라.
그리고 다시 어떤 일을 할 때-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서
니 연료로 삼으면 되잖아.
인생은 실전이였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를 우쭈쭈- 해주던 집단 속에서만 살아오다가, 처음으로 진짜 사회를 겪을 무렵이었다. 심지어 일은 못하는데 눈치가 빨라서 더 힘들었다. 결국 나의 첫 사회생활은- 함께 일하던 상사를 힘들게 하는, 일 못하는 아이로 끝이 났고, 그만둔다 소리도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버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거다.
화난 복어처럼 부푼 못난 마음이 지나가는 오빠 놈의 한 마디에 터져버렸다. 그런데 묘하게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오히려 "괜찮아. 훌훌 털어버려." 하는 말보다 더.
그럴 때가 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순간들. 내 머리에 스위치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Off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웠던 기억들, 바람피우고 떠난 전남친 새끼와의 추억들 등- 이상하게 그런 나쁜 기억들은 떨쳐버리고 싶은 데 내 힘으론 도저히 어떻게 떨쳐낼 수가 없다. 그럴 때 "그 생각하지 마, 잊어, 훌훌 털어버려" 등의 위로는 미안하지만 하나도 영양가가 없는 위로들이다. 특히나 나 같은 소심쟁이 생각충들에겐 더더욱.
오빠 놈은 차라리 그 기억을 "묻어두라"라고 했다. 그리고 가슴속 지하 2층 정도에 묻어둔 그 기억을 다음 기회가 왔을 때, 활활 태울 수 있는 연료로 삼으라고 했다. 특히, 그 기억이 나로 인해 생긴 안 좋은 기억이라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들어 줄 아주 좋은 연료가 될 거라고.
오빠랍시고 인생 짬바 한 숟가락 섞어 해준 저 말이 ,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는 걸 보면 그당시 나에게 참- 큰 위로가 됐었나보다. 맨날 실없는 소리나 해대질 않나 나를 못 괴롭혀 안달이던 오빠 놈이었는데 말이다.
근래에는 조금 철이 들었는지 오빠 노릇을 하고 난리다. 백수 동생이 불쌍한지 밥도 사주고 심지어 용돈도 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좀 걱정이 되긴 하다. 어제는 오빠에게 안 쓰는 밥솥을 달라고 하니 알았다-하고 차로 슝 가져다주질 않나- 밥 사달라고 땡깡을 피워봤더니 초밥도 사주고 갔다. 강산이 3번 정도는 변해야 인간도 변하나 보다. 아무튼- 더 이상 칭찬하다가는 키보드를 치고 있는 손가락이 안 펴질 것 같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오빠 놈의 훈훈한 이야기는 서둘러 끝내고자 한다. 고마워-ed. 형제여.
(+)라고 했는데, 오빠 ㅅ끼가 내 드론을 빌려가서는 다 뿌셔놨따...
인간은 안 변하나 보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