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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면 Oct 24. 2018

여전히 무섭다

쫄보의 여행

 이 글을 쓰기 위해 네이버 날짜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오늘이 출국한 날로부터 573일 째란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한비야 같다며 대단히 용기있고 대범한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여전히 왕쫄보에 길치킹이다. 573일간의 여행 동안 소매치기를 비롯한 크고 작은 범죄를 그렇게도 많이 겪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무서웠다.


 암스테르담에서 브뤼셀로 넘어왔다. 출장 차 네덜란드에 온 친구와 함께 있다가 다시 혼자가 된 직후였다. 밤 10시 22분. 브뤼셀 Midi역에 도착했다.


 이제 그런 촉은 있다. 나라가 바뀌거나 도시가 바뀌면 그 곳에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 '아- 여기 위험하겠구나' 하는 촉. 브뤼셀이 그랬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사람도 없고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아 어두컴컴했다. 내리지마자 가방 메는 걸 재정비하고 싶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에 가방도 똑바로 못메고 거의 뛰다시피 역안으로 들어왔다.


 키 160도 안되는 동양여자애가 20kg가 넘는 배낭을 앞 뒤로 메고 풍뎅이처럼 뛰어다니니 몇 개의 시선들이 내게로 꽂혔다. 버스 정류장을 찾아야하는데 안내표지판이 엉망이다. 겨우 찾은 안내표지판은 영어도 없다. 대충 버스같이 생겨먹은 그림 표시를 보고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 편에서 아주 체격좋은 형님 세명이 걸어온다. 뒤를 돌아봤는데 내 뒤엔 아무도 없다. 그럼 다시 방향을 돌려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가야지 뭐. 3:1로 싸우면 지니까.


 다시 뒤돌아가는 길에 한 젊은 커플과 마주쳤다. 말을 걸었다. 이럴 땐 로컬 찬스를 써야한다. 벨기에는 프랑스어를 쓰니까- 익스큐즈무아 시전. 다행히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이여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고 버스정류장은 자기를 따라오면 된다고 한다.


 그 커플 덕분에 겨우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벽에 붙어있는 막차시간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차가 끊기진 않은 상황. 그제서야 앞 가방을 풀어놓으며 한 시름 놓으려 하는데 저 멀리서 또 뭔가 무서운 느낌의 무리들이 내 쪽으로 온다.


아씨-무서운데ㅠㅠ
왜 또 이쪽으로 오고 난리야...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동그란 안경을 쓴 벨기에 청년이 캐리어를 끌고 버스정류장에 선다. 이 청년이랑 같이 있으면 덜 무섭겠지싶어 스윽 그 청년 옆에 다가섰다. 무서우니까 또 말을 건다. 익스큐즈무아? 27번 버스 정류장이 여기 맞니? 하고 말을 걸자 아주 친절하게 여기 맞다며 자기도 27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한 5분을 기다렸을까? 27번 버스가 왔다. 버스기사에게 버스비가 얼마냐고 묻자 버스정류장 역 옆 기계를 가르키며 저기 저 기계에가서 티켓을 끊어오라한다. 어이쿠- 몰랐네? 하고 다시 가방을 메고 버스에서 풍뎅이처럼 날아 티켓 머신앞에 섰다.


 영어버튼을 누르고 싶은데 안 눌린다. 스크린에 보이는 글씨은 프랑스어 같은데 뭔말인지 1도 모르겠다. 도움을 청하고자 불쌍한 표정으로 버스기사 아저씨를 쳐다보니 어쩌라고- 이런 표정을 짓고계시고.


 그렇게 표를 못끊어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때 아까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던 형들 중 한명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내 앞에서 50유로짜리 지폐를 팔랑거리며 "너 잔돈있니?"한다. 전형적인 소매치기 수법이다. 눈 앞에서 동전을 와르르 쏟거나 큰 돈을 흔들어보이며 시선을 분산시킨 다음 주머니나 가방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는 수법.


  50유로짜리 돈을 보자마자 1초만에 상황을 인지하고 바로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꼭 쥐었다. 그리고 황급히 그 자리을 뜨기위해 뒷걸음질 치는 순간 뒤에 있던 다른 일당과 내 가방이 꽝-하고 부딪혔다. 뒤로 넘어질 뻔 한 상황이라 팔을 허우적 허우적 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는데, 그 놈들은 그런 나를 보고 빵-터진거다. 깔깔거리며 웃던 한 놈이 내 가방을 막 팡팡-치면서 날 조롱하는 것 아닌가...


 그 때, 누가 내 옆에 선다. 그 형들에게 프랑스어로 뭐라뭐라한다. 방금 버스정류장에서 같이 서

있던 벨기에 청년이다. 내가 어리버리떨고 있으니까 버스에서 내려 날 도와주러 온거다.


내 버스카드로 두번 탭 하면 되니까 버스를 타는 게 좋겠어.


 그 청년 덕분인지 그 형들은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않았고, 땡큐 메르시-를 한 10번 정도 반복하며 청년을 따라 겨우 버스에 올랐다. 버스정류장을 찾고 버스를 타는데까지 15분 정도 흘렀으려나. 자리에 앉자마자 식은땀이 난다. 이 추운날 등이 땀에 다 젖어있다. 그 15분 동안 얼마나 긴장을 한건지 순간 현기증까지 나버린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현타가 온다. 아니, 이렇게 쫄보가 대체 무슨 여행을 하겠다고 이러고 다니나 싶은거다. 그 와중에 바닥에 세워둔 배낭이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배낭을 다시 세우며 생각했다.


가방만 이렇게 크면 뭐해. 나는 여전히 쫄보인데- 여전히 무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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