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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면 Mar 17. 2019

버스, 어디까지 타봤니?

34시간 동안 에티오피아 로컬 버스 탄 썰

 결국, 여권으로도 한 건 했다. 1번의 버스, 3번의 미니밴을 갈아타고 "이동만" 17시간에 걸쳐 도착한 에티오피아-케냐 국경도시 모얄레에서 알았다. 전 숙소에 여권을 놔두고 왔다는 것을. 전날 체크인을 하기 위해 동행들을 대표해 제출한 내 여권을 숙소 주인에게 돌려받지 못하고 그냥 와버린 것이다.

 다시 그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12시간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현실을 부정하며 열심히 가방을 뒤졌지만 여권은 없었고 신(God)도 없었다... 인샬라.


 회복 호흡 3회 실시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사고 회로를 돌려봤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에 돌아오라는 신의 계시인가?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뭐 보기나 옵션 조차도 없는- 해결방법이 너무나 명확한 문제였다. 여행을 하기 위해서면 여권은 무조건 필요하고 그동안 다녀온 모든 국가들의 스탬프가 찍혀있는 나의 보물 1호 여권을 버릴 생각은 1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오히려 잘됐다-'


 버스로 돌아가는 방법 외 에는 돌아가는 방법이 없으니, 어떤 고민도 필요 없이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이때가 1월 24일 오전 5시 30분. (이 사건을 124 사태라고 명명하겠다.)

124 사태 발생 30분 경과.
 우선 동행들을 깨워 내 상황을 전하고 혼자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깡촌 국경도시 모얄레였다. 공항은 만무하고 아와사까지 가는 다이렉트 버스가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하루에 딱 한대 다이렉트 버스가 있었다. 숙소에서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준 툭툭이 기사 덕분에 운 좋게 출발 5분 전에 도착했다. 럭키를 외치며 검표원에게 목적지인 아와사를 한 백번 말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새벽 6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석이였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버스 정도의 버스에 동양인 여자애가 혼자 올라타니 신기한가 보다. 뻥 안치고 두 살배기 애기 포함 승객 45명 전원이 날 쳐다본다. 눈동자가 합쳐서 90개다. 아무리 관종인 나라도 이런 관심은 처음이라 살짝 쫄리는거다.

 생각해보니- 아프리카 와서 동행 없이 혼자 움직인 게 처음이라는 생각에 그제야 무서워졌다. 하지만 속으로 '내가 최란형인데, 그래도 굴러먹은 여행짬이 있는데-' 하고 어깨를 쫙 펴고 한 발짝을 떼는 순간 7명의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나에게 동시에 질문을 해왔다. O.M.G


나를 너무 사랑해 주시던 에티오피아 친구들. 응 나도 사랑해...


 혼비백산이라는 말의 어원이 혹시 에티오피아인아 싶을 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차이나? 차이나? 하고 어설픈 영어로 이미그레이션 직원을 능가하는 호구조사를 시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도 못 알아듣는 에티오피아 말로 질문 폭격하시는 분도 계셨다. 한 남자는 내 옆자리에 앉더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찝적거리기까지하는거다.

나만 외국인인 에티오피아 만원 로컬 버스.



하... 이렇게 12시간을 가야 한다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뒷자리에 애기가 뿌엥-하고 운다. 사실 내가 더 울고 싶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 습습하하- 정신 똑바로 챙기고 리얼 로컬 에티오피아를 즐겨보기로 했다.

 우선, 내가 타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통역을 도와준 옆 옆자리 청년의 이름은 아함메드. 이것저것 말해줘서 내가 먼저 나이스튜미츄 하고 이름을 물어봤다. 아함메드는 아와사에 일을 하기 위해 숙소를 구하러 간다고 했다. 경찰이나 군인이 갑자기 올라타서 짐 검사, 검문 등을 할 건데, 그럴 때마다 겁먹지 말고 버스에서 내리면 된다, 3시간 후에 도착하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30분 후에 버스가 다시 출발할 거야- 등 이 12시간짜리 버스 이용 꿀팁을 대방출해주는 아주 고마운 친구였다.

 아함메드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 좌석을 차지했다. 운 좋게도 창가 자리라서 창문을 열고 싶었는데- 내 앞자리에서만 창문이 열리는 거다. 그래서 앞자리에 무뚝뚝하게 앉아있는 중년 아저씨에게 똑똑-하고 말을 걸었다.


"익스큐즈미, 캔유오픈더윈도우? 플리즈?"


하고 묻자 오케이를 날려주시며 아주 창문을 끝까지 다열어제껴주신다. 에티오피아 상남자셨다. 그렇게 12시간짜리 여권 찾기 여행의 버스가 출발했다.

 다행히 지금 에티오피아 날씨가 딱 한국 가을 날씨다. 그늘에 있으면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 차 타고 산책 나가는 개처럼 창문에 매달려 모얄레의 아침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한 십오 분쯤 달렸을까? 버스가 갑자기 갓길에 선다. 버스기사가 문을 열자 승객들이 다 내린다. 뭐지...? 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총을 든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있다. 군인들 어깨에 맨 장총에 괜스레 쫄려서 나도 슬쩍 따라 내리려고 했더니, 아함메드가 "넌 안 내려도 됨" 하고 내리려는 나를 앉힌다. 에티오피아 남부는 부족 간의 분쟁이 잦은 지역이라 정말 한 시간에 한 번씩 검문을 한다. 버스에는 유일한 외국인인 나와 애기를 데리고 있는 엄마, 그리고 팔을 다친 사람 3명만이 타고 있었고- 이때 장총을 든 군인이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노약자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닌데- 내려야 하나 어째야 하나 란절부절거리고 있었는데- 장총 군인 오빠가 앉아있어도 된다며 눈짓으로 말해줘서 바로 씻다운했다.

모얄레 국경에서는 모든 차들이 예외없이 멈춰서서 검문을 받는다.


 검문이 끝나고 다시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 짐을 확인한다. 누가 봐도 새 전자제품 박스가 뜯겨있는데 불평 없이 다시 붙여 놓은 사람을 봤다. 누구 하나 이 검문에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좀 신기했다. 화나거나 귀찮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렇게 오전 내내 달려 점심시간 즈음, 모얄레-아와사 구간의 딱 중간지점인 하게레 마르얌에 도착했다. 로컬 식당 몇 개가 이어 붙어져 있는 곳에 버스를 세워주며 1시간 동안 런치 타임이라고 한다. 나는 배가 고프지가 않아서 그냥 버스에서 기다려야지 하고 이어폰을 꽂았는데- 내리는 승객들이 앉아있은 나를 보고 한마디 씩 다 거든다. 밥 먹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런치를 먹으라고 한다. 하- 이 오지랖 쟁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ㅋㅋㅋ 고마운데 ㅠㅠ 나 배 안 고파 땡큐 벗 아엠 풀을 한 3번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큰소리로 "아이돈헤브머니" 해버렸다.


흔한 12시간 버스의 점심시간. 근처 시장 버스를 세우고 기사도 승객도 밥을 먹으로 내린다.

 폴더폰을 쓰고 있는 아저씨에게 나는 아이폰 X를 들고 돈이 없다고 말했다. 대답하기 귀찮아서 한  소리가 바나나로 돌아왔다.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 아까 창문을 활짝 열어준 앞에 앉아계시는 아저씨가 나에게 바나나를 사줬다. 버스가 승객을 싣고 내리기 위해 작은 마을에 서면 아이들이 껌, 음료수, 바나나, 땅콩 등을 들고 버스 근처로 우루르 모여드는데- 그냥 바나나 한 다발이 얼만지 궁금해서 이거 얼마야? 하고 물어본 걸 봤나 보다. 어차피 나는 바나나 한 다발을 사도 다 못 먹기 때문에 살 생각도 없었다. 근데 아저씨가 한 다발을 사더니 두 개를 뚝 떼서 나에게 준다. "유 헝그리, 유 노머니" 하면서.


1인 국내 총생산 3만 달러에 가까운 한국 국민이 8백달러 하는 에티오피아 국민에게 바나나를 얻어 먹고 있는 중...

 

 갑분 감동... 사실 8시간 동안 500ml짜리 물 하나로 연명하고 있었다. 배가 미친 듯이 고프진 않았지만 오후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바나나를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땡큐를 연발하며 바나나 두 개를 받으니, 갑자기 옆에서 뒤에서 손이 막 들어온다. 앞에서 본인들의 과일과 과자 등 갖고 있던 간식을 나에게 주는 것이다. 먹으라고. 바나나 두 개에 이름 모를 열대과일 3개, 초콜릿 쿠키에 후식하라고 껌까지 받았다. 갑자기 버스 안에서 최란형 팬미팅이 열리는 줄 알았다.

버스가 정차하면 창문에서는 작은 장터가 열린다. 사실 말이 장터지... 도떼기 시장임...


 사실 말이 12시간이지 한 6시간 앉아있으면 정말로 꼬리뼈가 부서질 것 같다. 나처럼 차만 타면 자는 잠만보도 12시간 버스는 자도 자도 끝이 없는 정말 긴 시간이었다. 심지어 에티오피아 유심을 안 사서 인터넷도 안된단다. 로밍 신청해보려고 한국 유심까지 끼워서 KT에 전화해보니 에티오피아는 제휴된 통신사가 없는 국가란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잠 자기, 자다가 일어나서 할거 없으니까 안 읽던 책을 갑자기 읽거나 글을 쓰고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랑 하는 시답잖은 대화가 다였다. 그게 다였다.


 지금은 아와사에서 여권을 찾아 다시 5시간 버스를 타고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올라왔다. 도저히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어 다음 목적지인 케냐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를 끊었다. 그러니까 3박 4일 동안 17시간 + 17시간 = 34시간 왕복으로 차를 타고 에티오피아 국경까지 갔다가, 결국은 비행기를 타고 케냐로 넘어가는-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 돈은 돈대로 쓰는 최악의 3박 4일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뭐- 별수 있겠어, 이것도 다 여행이지 뭐- 하고 웃어넘기는 수 밖엔.

12시간을 돌아가 찾은 내 소중한 여권ㅅ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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