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망함: 낯을 들고 대하기가 부끄럽다.
머리가 아파서 기다시피 차가운 소파에 누웠다.
차가운 감촉을 더 느껴보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꼼이 내 배 위로 올라왔다.
배 위에 엎드리고 누워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길래, 날 걱정하는 건가 하고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흐르지 않은 게 다행이지.
꼼은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더니 내가 베고 누운 쿠션을 빼앗았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쿠션을 되찾고 싶었나 보다.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꼼은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며 내게 항의하는 눈빛을 쏘았다.
알았어. 머리 치우면 되잖아.
꺾인 고개를 바로 하고 몸을 움직여 쿠션 아래로 내려가니 그제야 만족한 꼼이 잘 태세를 취했다.
이제는 섭섭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프니까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꼼을 잘 알면서 일말의 기대를 한 내가 어리석은 거겠지.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에 치사하게 굴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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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은 나를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지만, 내가 울거나 아프거나 하는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나는 나를 잘 알아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으나 놀라울 정도로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그냥 쓱 보고 ‘그런가 보다’ 하고 만다.
그래서 꼼을 보고 있으면 거울 치료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주변에서 내게 섭섭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이런 거구나.
그럴 만하네.
이런 나를 알아차리라고 머리가 아팠나 보다.
내 삶의 모토는 ‘그런가 보다’다.
내가 정한 건 아니고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자란 건가.
아무튼 나의 이런 태도는 개와 사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꼼이 배변 실수를 해도 ‘급했나 보다’ 하고 꼼이 온 집을 갉아먹어도 ‘이가 가렵나 보다’ 해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실랑이 없이 원만히 지내오고 있다.
이건 우리 가족의 전반적인 습성이기도 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반기를 들었으면 다툼이 되었을 텐데 다 같이 둘러앉아 ‘개는 이런가 보다’하고 말았다.
개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우리에게 과분하도록 대단한 꼼이 찾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꼼은 무던한 우리와 섞여 무던하게 자랐다.
딱히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배변을 가렸고, 딱히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갈이가 끝나자 알아서 사고 치기를 그만두었다.
그나마 꼼이 ‘저질렀다’고 표현할 만한 일이라고는 라벨 물어뜯기 정도랄까.
꼼은 인증받은 라벨 귀신이다.
전생에 라벨과 철천지원수를 진 게 틀림없다.
한참을 혼자 방에 들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으면 아무리 꼼이라지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있는데,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 뭘 하고 있나 살펴보면 백발백중 셋 중 하나다.
천사 같은 얼굴로 자고 있거나, 터그놀이용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거나, 몰래 숨어 라벨을 씹고 있거나.
베개나 이불을 갈기갈기 찢어 놓기라도 하면 말리기라도 했을 텐데
작은 라벨을 소중하게 붙잡고 야무지게 씹고 있는 꼼을 보고 있으면 하지 말라는 소리도 쏙 들어가고 만다.
그래, 그거라도 해라.
축축해진 커버는 빨면 그만이지만 불 꺼진 으슥한 방 안에서 남몰래 일탈을 즐기는 짜릿함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잘근잘근 마음껏 자유를 씹고 나온 꼼이 한껏 의기양양해져 있어 마냥 웃길 따름이다.
덕분에 우리 집 라벨은 대부분 쭈글쭈글하다.
무슨 기준인 건지 꼼에게 선택받지 못한 라벨들만 멀쩡히 읽을 수 있다.
그나마도 요즘엔 통 라벨엔 관심을 보이지 않아 곳곳에서 발견되는 멀쩡한 라벨들이 낯설다.
꼼이 그새 또 자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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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은 자라면서 독립적인 개가 되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정말 서당에서 자란 마냥 올곧은 자세로 앉아 나의 모든 참견을 거절한다.
거절만 잘해도 이 세상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지만 꼼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
꼼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거절 뉘앙스는 내가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예의가 발라서
내가 괜한 개를 괴롭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온몸이 산발인 채로 앉아 ‘저는 괜찮습니다.’는 개가 왜 이리도 타당해 보이는 건지.
빗을 든 내가 머쓱해질 지경이다.
게다가 꼼은 거절할 땐 침묵으로 일관해서 우리를 감싸는 공기의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꿀 줄 안다.
의도를 했든 안 했든 나에겐 그 방법이 아주 잘 먹힌다.
어디가 불편한가, 지금 내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망설이는 사이에 꼼은 도망가 버리고 없다.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만,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꼼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손바닥과 머리 위를 넘나드는 꼼답게 꼼에겐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몇 가지 있다.
그중 제일은 바로 이것.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꼼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어쩔 땐 좋아하는 것 같다가도 어쩔 땐 안 좋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런 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의문이다.
지금 잠깐 다시 고민을 해봤는데 음, 모르겠다.
나와 단둘이 사는 세상이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지만
꼼이 어떠한지 물어보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이게 참 난감하다.
꼼은 사람을 가린다.
어떤 사람에겐 자기가 먼저 꼬리를 흔들면서 인사하다가도 어떤 사람에겐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둔다.
나름의 기준이 있으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게 뭔지 통 모르겠다.
꼼이 사람들과 인사를 할 때마다 옆에서 유심히 관찰해 봐도 결론은 언제나 오리무중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아니고, 키가 큰지 작은지도 아니고, 행동이나 태도의 차이도 아니다.
그냥 순 자기 맘대로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꼼과 인사를 해도 되냐 물으면 꼼이 대답을 좀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
지금 너의 마음은 어떠니? 인사를 하고 싶니?
된다고 대답했지만 인사를 하지 않고 도망가는 꼼의 경우와
안 된다고 대답한 나를 뒤로하고 인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꼼의 경우를 비교했을 때
뭐가 더 민망한지 겨루면 후자 쪽이 아주 약간 더 앞서서 나는 그냥 “네.” 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럼 자연스레 다음은 꼼의 몫이다.
(난 몰라.)
내민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민망한 인사의 현장에서는 뒷수습은 꼼에게 미루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경이다.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을 내게 미루고 혼자서 침묵을 지키는지.
나는 야속한 꼼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 벅차서 간단하게 겁보로 만들기로 했다.
아, 근데 얘가 겁이 많아요.
얼결에 겁 많은 개가 된 꼼이 곧바로 만난 다음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발. 그러지는 말아라.
꼼과 산책을 하면 “여러분, 여기 귀여운 개가 있습니다!” 하고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과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예상할 수가 없어서 되도록 피하고 싶지만 <예상할 수 없음>에서 오는 즐거움을 놓치기는 아쉽다.
특히, 어린이들과 마주칠 때 이 모든 건 극대화된다.
극대화된 <예상할 수 없음> 속에서 극대화된 <즐거움>이 있다.
‘각양각색’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시기여서 그런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난다.
예전엔 꼼을 보자마자 달려와 무작정 만지거나 꼬리를 잡아끄는 어린이들도 있었으나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면서 그런 어린이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반려동물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이들에게로 전달된 것 같다.
8년 사이에 참 많이도 변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참 빠르게 흡수한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인사해도 돼요?”하고 묻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다음은 꼼의 몫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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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은 어린이들에게 조금 더 관대한 편이다.
덕분에 민망한 상황은 어른에 비해 덜하다.
만약 어른이 자신을 마구잡이로 만졌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을 테지만 어린이가 그러면 나의 중재를 기다린다.
그리고 웬만하면 어린이가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곤 한다.
제 갈 길 가기 바쁜 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 꼼을 보고 있는 것도 웃음이 나는 포인트 중 하나다.
그런 꼼 옆에서 나도 뒤질 수는 없어서 어린이에게만큼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나의 구구절절은 회유이기도 하다.
‘각양각색’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개 역시나 ‘각양각색’이어서 섣불리 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알려주기가 머뭇거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대답에는 꼭 ‘꼼은 이런데, 다른 개는 아닐 수도 있어.’가 붙는다.
꼼만 해도 매일이 다른데 꼼이 정답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나의 긴 설명에도 꼼을 만지고 싶어 하는 어린이에게는 꼼의 등을 내어준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꼼이 놀라지 않게 어린이의 손과 내 손을 겹쳐서 냄새를 맡게 해주고는 동시에 살살 쓰다듬는다.
그걸로 만족하고 돌아서는 어린이도 있지만 가끔은 꼼의 머리로 손이 넘어가는 어린이를 만날 때도 있다.
돌발상황을 대비해 그것만큼은 허락해 주지 않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손이 얼굴 쪽으로 향하는 모양이다.
그럴 땐 미안하지만 꼼을 데리고 곧바로 자리를 떠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은 쓰다듬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가 없다.
내겐 어린이의 안전도, 꼼의 안전도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이 중요한 일이기에 더 그렇다.
반면, 개와 살고 있어 개를 잘 아는 어린이에게는 구구절절이 필요 없다.
딱 봐도 내가 하수고 어린이가 고수다.
성큼성큼 다가와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개가 있음을 내게 먼저 알리는 태도로 보아
나는 이 어린이를 따라가려면 한참 남았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능숙하게 꼼을 척척 만지면서 대화의 주제는 오로지 ‘자기 개’인 점도 고수답다.
아무래도 꼼과 인사하겠다는 목적보다는 내게 자신의 개를 소개하고 싶은 목적이 더 강한 듯하다.
이름부터 시작해 나이, 성별, 질병 유무와 거주 환경까지.
내가 알아도 되나 싶은 정보를 술술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는 어느새 모르는 개의 신상을 앉은자리에서 전부 알게 된다.
목적 달성을 끝낸 어린이가 떠난 자리엔 하도 쓰다듬어서 등이 납작해진 꼼과 어리둥절한 채로 웃고 있는 나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모든 걸 알게 된 어떤 개의 잔상이 남아있다.
나는 앞으로 이 개를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그 어느 것도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 끝엔 참 많은 것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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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거나 아프거나 하는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꼼이지만 꼼은 대부분의 시간을 나를 지켜보는 데 쓴다.
나의 움직임과 반응을 하루 종일 살피는 꼼이기에 어쩌면 꼼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나에게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순 자기 맘대로가 아니라 순 나를 살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허락했을 게 분명한,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는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두 팔 벌려 반기는 걸로 보아 꽤 타당한 추측 같다.
어린이에게만큼은 관대한 건 또 어떠한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람을 가린 건 꼼일까, 나일까.
이것도 거울 치료인 건가.
민망하다.
이런 나를 알아차리라고 꼼이 내게 왔나 보다.
앞으로 우연한 만남에서 살펴보아야 할 건 꼼이 아니라 내가 되었다.
세상에나. 오늘 밤은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차가운 소파가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