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 남에게 대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고 부끄럽다.
개는 후각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숨바꼭질에는 재능이 없다고 한다.
찾아야 하는 대상과 일정 거리 이내에 있으면 온 세상이 그 대상의 냄새로 가득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냄새로 가득한 집안에서 꼭꼭 숨은 나를 찾는다는 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모래알 찾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헤매는 꼼에게 “솔직하게 말해 봐, 너 개 아니지?”하고 놀려댔으니.
한때 진심으로 꼼의 정체를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알고 보니 꼼은 틀림없는 개였다.
그리고 나는 못된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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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맥락으로 개는 후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코끝에 배어있는 가족의 냄새가 옅어짐에 따라 홀로 남겨져 있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출을 할 때면 내 냄새가 가장 잘 배어있을 잠옷을 일부러 현관 앞에 놔두고 간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현관 앞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꼼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꼼아, 냄새가 옅어지는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재빠르게 네 곁으로 돌아올게.
이건 나의 굳센 다짐이기도 하다.
술잔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관우의 사기로 볼일을 끝내자마자 돌아오겠다는 나의 다짐.
꼼에겐 분리불안이 있다.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집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극한의 분리불안은 아니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 노즈워크 장난감에 밥을 넣어주면 내가 나가든 말든 쳐다도 보지 않고 삼매경에 빠져있었으면서
준비해둔 밥을 다 먹고 나면 그제야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망부석이 되어 현관 앞을 지킨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
편하게 누워 잠이라도 자면 바랄 게 없겠으나, 꼼은 쏟아지는 잠과 싸우면서까지 기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수시로 CCTV를 들여다보면서 “얘 또 안 자네. 안 자.” 하며 걱정하는 게 나의 외출 루틴이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맞다. 사실 분리불안은 꼼보다 나에게 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꼼이 혼자 있을 때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설치한 CCTV는 꼼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까먹었으나 예상보다 일정이 길어져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CCTV를 확인하던 모습뿐이니 아마 지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던 중이었던 것 같다.
늘 그랬듯이 현관 앞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화면을 보는데 화면 속 꼼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했다.
내가 예상한 건 잠이 가득한 눈을 하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꼼이었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 소리를 켜보니 꼼이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소문으로만 듣던 하울링을 하는 꼼에 시공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건지.
미친 듯이 질주를 하고 있는 심장에 더해 머릿속에는 사이렌까지 울려서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깜깜한 밤을 혼자 맞이해야 했을 꼼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더 미안했다.
온몸으로 울부짖을 만큼 커다란 두려움 안에 꼼을 가둔 게 깜깜한 밤이 아니라 나인 것만 같아서
그날의 나를 평생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분리불안은 그날 이후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긴 시간 꼼을 혼자 두고 나가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날 처음 맛봤던 심장 레이스가 시작된다.
쿵쾅쿵쾅.
내가 없는 사이 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꼼을 혼자 있게 한 내 잘못이니까.
변명이 먹힐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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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개와 사는 게 처음이라지만 나는 꼼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중이다.
좋은 일로 적립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성실한지.
거센 비바람 속에서 세워진 죄책감들은 쌓이고 쌓여 공든 탑이 되었다.
무너질 생각은 안 하고 하늘에 닿기 일보 직전이다.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
꼼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면서 새로운 사고를 치는 나를 꼼은 어떻게 생각할까.
눈을 마주 보며 한 약속들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걸로 어떻게 잘 융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평화로움을 뚫고서 비바람과 함께 새로운 약속 거리를 들고 나타나는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움을 누르고 고백해 보자면, 최근에 꼼과 한 약속은 <주사 맞은 날에는 밤에 보채도 다 받아주기>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광견병 주사를 맞고 집에 돌아온 꼼은 긴장감이 풀렸는지 오후 내내 자고 또 잤다.
자다가 밥만 먹고 다시 자는 꼼에 밤에는 어떻게 자려고 저러나 걱정했던 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밤새 나를 깨우고 또 깨우고, 재우면 깨우고, 달래도 깨우고, 무시해도 깨우고, 애원해도 깨웠다.
무한 굴레 속에서 지친 나는 그만 짜증을 내었다.
꼼아, 지금은 자는 것밖에 할 게 없어.
나의 모진 반응에 의기소침해져 자는가 싶다가도 잠들 만하면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와 자신을 쓰다듬어주기를 바랐다.
쏟아지는 잠을 거역하기가 힘들어서 쓰다듬던 손이 스르륵 멈추면 그걸 놓칠세라 꼼은 자세를 바꿔 자신이 아직 안 자고 있음을 내게 알렸다.
꼼아, 잘 시간이야. 이러고 있을 시간 아니야.
꼼은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였다.
억지로 눕히면 벌떡 일어나는 집념의 오뚝이.
결국 나는 그날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퀭한 눈으로 비척비척 걸어 다니는 나를 보며 엄마가 “너 어젯밤에 꼼 혼내더라.”라는 말을 건넬 때까지 나는 속으로 꼼을 원망하고 있었다.
내가 분명 어제 꼼한테 밤에 자려면 지금 일어나서 좀 놀다 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안 듣더니만
밤새 깨우고 또 깨우고, 잘만 하면 깨우고, 계속 만지라 그러고! 쟤 밤 꼴딱 샜어.
하소연을 늘어놓기에 좋은 적자를 만난 나는 말보가 되어 우수수 서러움을 쏟아내는데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꼼 어제 주사 맞았잖아. 그게 아팠나 봐. 원래 아픈 주사 맞은 날에는 밤새 보채. 너도 그랬어.
새벽 내내 꼼과 실랑이하면서도 꼼이 아파서 그러는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미안함만 남았다.
밤새 아프다고 나를 깨운 꼼에게 제발 좀 자라고 했으니.
역시 나는 못된 게 틀림없었다.
꼼에게 하는 실수는 유독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나의 일정에 맞춰 꼼의 하루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하루를 똑 떼어다가 꼼에게 붙여주고 싶은데 어쩐지 자꾸만 꼼의 하루를 빌려 쓰는 기분이다.
이미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배려를 받아 놓고서 돌려준 것이라고는 실수뿐이던 날엔, 이걸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작 미안하다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데도 꼼은 눈 깜짝할 새 나를 용서해 줘서 해소되지 않는 부채감만 늘어난다.
반나절이라도 나를 미워하지, 왜 자꾸 만지래.
불퉁한 마음에서 튀어나온 투덜거림이 밉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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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과 지내다 보면 마냥 웃을 수 없는 사소한 실수를 연발하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풀숲을 비집고 들어간 꼼이 수상해 줄을 당겨보면 막상 아무것도 없다거나,
벌레에 코를 대는 줄 알고 줄을 당기면 알고 보니 풀이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시시때때로 벌어진다.
바깥 냄새를 맡게 하려고 산책을 나왔으면서 정작 냄새 맡으려는 꼼을 뜯어말리는 꼴인 게 참.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개에게는 진드기에게 물려도 아무렇지 않은 면역력을 줘야 하지 않나 싶다.
산책은 매일 해야 하는데 산책길에는 신경 써야 할 게 수두룩한 데다가 내가 저런 실수를 저지르는 날에는 한숨이 삼켜지질 않는다.
아휴, 개랑 산책하기 힘드네.
아니, 벌레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미세먼지를 걸러낼 수 있는 코를 주던지,
아님 염화칼슘을 밟아도 멀쩡한 발을 주던지.
더위와 추위를 피하면 황사가 몰려오고 황사를 보내면 미세먼지가 기승이고.
눈 내리면 염화칼슘에 가을에는 은행이 앞길을 막는데 그 와중에 벌레까지 달려든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버린 쓰레기까지!
첩첩산중.
호랑이도 놀라 달아나겠다.
게다가 산책은 외부적 요인뿐 아니라 내부적 요인도 영향을 줘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꼼아, 밖을 봐. 이렇게 우중충한데 꼭 나가야겠니?
내부적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 마음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흐린 날에는 되도록 집에 있고 싶은 나의 게으름을 아직 무찌르지 못하고 있다.
머리는 비가 오기 전에 나가라 하고 마음은 갈팡질팡에 몸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오 분만- 꼼아, 오 분만- 하고 미루는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때면 진짜 말도 안 되게 복잡한 마음이 든다.
산책을 안 나가도 된다는 생각에 기쁘다가, 비가 오기 전에 빨리 나갔다가 올 걸 하고 후회하다가,
잠시나마 진심으로 기쁨을 느낀 내가 어이없다가, 이내 꼼에게 미안해진다.
꼼의 관심을 장난감에 돌리려 주섬주섬 삑삑이를 꺼내 드는 내가 얄밉기도 하다.
다행히 삑삑이에는 언제나 격한 반응을 보이는 꼼이어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삐삐삐삑삑 소리를 내면 산책을 기대하던 꼼은 이제 없고 엉덩이가 위로 올라간, 놀 준비를 마친 꼼이 와 있다.
이렇듯 웬만한 일에는 눈 감고 넘어가 주는 꼼이지만, 가끔은 목청 높여 내게 항의를 하기도 한다.
워워웡!
아니야. 이거 버려야 해.
워워워웡!
꼼아, 이거 못 먹는 거야.
웡웡!
화는 내지 말고. 나도 몰랐어.
워워워워워웡!
그러게, 누가 여기다 간식을 떨어트리래?
간식을 나름 숨겨두었던 건지 아니면 떨어트리고 몰랐던 건지 바닥에 있던 걸 내가 못 보고 밟아버렸다.
바닥에 떨어졌으면 3초 안에 먹을 것이지 왜 놔둬서 내가 밟게 만드는지.
간식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고 있었으면서 내 발에 밟힌 간식을 주워 들자마자 달려와 따지는 꼼이 황당했다.
거칠게 화를 내는 꼼에 내가 밟은 게 간식이 아니라 악어의 이빨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뭣도 모르고 악어의 이빨을 밟아 곧 삼켜지게 되는 건가.
자기 발을 밟는 건 괜찮아도 자기 간식을 밟는 건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다.
여러 이유로 더러워진 간식을 버리고 새 간식을 꺼내 들기까지 꼼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지켜봤다.
바닥에 떨어진 간식은 먹고 싶지 않아서 계략을 쓴 것 같기도 하고.
꼼이 설치한 덫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새 간식을 소중히 입에 물고 미련 없이 총총 자리를 떠나는 꼼의 뒷모습이 대단한 지략가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꼼은 제갈량 쪽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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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 못지않게 나 역시나 후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꼼이 덮는 담요에서 나는 냄새로 ‘아, 이제 꼼이 씻을 때가 됐구나.’ 알아차리곤 한다.
담요에 배어있는 꼼의 냄새가 짙어짐에 따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씻을 때가 임박한 꼼의 냄새를 좋아한다.
꼼이 가지고 있는 냄새와 바깥에서 가지고 들어온 냄새가 섞여서 꼼에게는 계절의 냄새가 난다.
봄에는 흙냄새가, 여름에는 비 냄새가, 가을에는 낙엽 냄새가, 겨울에는 찬 냄새가 난다.
그래서 꼼의 등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면 계절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 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계절이 수없이 바뀐대도 사라지지 않는 꼼의 냄새는 내게 위안이 되어준다.
꼼이 그대로라는 게, 그대로 내 옆에 있어 준다는 게 고맙다.
미안함 뒤에는 언제나 고마움이 따라온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그래서 더 고맙다.
바람이 있다면, 온 집안에서 나는 꼼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곳곳에 밴 꼼의 냄새가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웬만하면 간식은 바닥에 떨어트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