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움: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
개를 쓰다듬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만져달라는 대로 한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대로 세상이 멈췄으면 싶다.
햇살을 받아 따사로운 개가 옆으로 누워 내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두고두고 눈에 담고 싶은 장면이다.
손에 느껴지는 털의 감촉과 풍겨오는 꼼의 냄새,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 느리게 깜빡이는 눈의 움직임까지.
사진으로는 미처 담을 수 없는 것들이다.
꼼은 본격적으로 잠들기 전에 꼭 자세를 고쳐 잡곤 한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잡은 후에는 더는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옆에 가만히 누워 꼼이 깊은 잠에 들 때까지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뿐.
잠에 빠져들다가도 내가 움직이면 벌떡 일어나는 꼼에 나는 어쩔 수 없는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
하루 중 가장 달콤한, 평화로움을 베고 누울 수 있는 호사.
다 꼼이 만들어낸 한낮의 황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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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는 잠을 부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자는 개를 보고 있으면 하품이 나오고, 잠들려는 개가 몸을 붙여오면 같이 눕고 싶어진다.
실제로 개는 내 수면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꼼이 오고 난 후로 내게 양이 필요 없어졌다는 게 그 증거다.
양 하나, 양 둘, …, 양 삼백사십오, 양 삼백사십육 셀 것도 없이 꼼의 콧바람 몇 번이면 꿈나라 직행이다.
어쩌다 날아가게 되었는지는 미궁이지만.
(콧바람에 날아갔나.)
이것과 별개로 꼼은 직접적으로 잠을 부르기도 한다.
웽!
(잘 시간이야!)
밤이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방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알려줬는데도 듣지 않거나, 듣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꼼은 먼저 침대로 올라가 보다 작은 소리로 나를 부른다.
웜!
(자러 와!)
내가 알맞은 응답을 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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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호흡은 서로의 부름에 알맞게 응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꼼과 나는 환상의 파트너다.
내가 손을 척- 내밀면 꼼의 손이 챡- 올라온다.
간식이 손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 정도야 몰래 윙크 한 번 하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간식이야 손에 들면 그만이니까.
매번은 아니지만 어쩌다 발동하는 ‘고집’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산책길에 간식을 대동하곤 한다.
풀숲 깊숙이 냄새를 맡겠다는 고집과 기어코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는 고집에는 간식만 한 게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마자 들리는 부스럭 소리 하나면 고집부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꼼의 눈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줄곧 나만 보고 있었다는 듯한 눈이다.
잘게 자른 간식을 손에 쥐고서부터는 앞으로의 모든 움직임은 내 발아래에 있다고 보면 된다.
내가 가는 길이 간식 길이리라.
내게, 정확히는 내 손에 숨겨진 간식에 충성을 다 하는 꼼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종종 재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웅성웅성. 저기 좀 봐. 눈 맞추면서 걷는 것 좀 봐. 웅성웅성.
꼼이 섭외한 분들도 아닐 텐데 어쩜 이리도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나신 건지.
그만하라는 말에도, 그만하고 제발 가자는 말에도 안 들리는 척 제 할 일을 마저 하던 개가
아무 말 없이 꺼낸 간식 하나에 세상 전부를 뒷전으로 두고 나를 올려다보며 걷는다는 게,
게다가 이런 희귀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사람들에게 뻔뻔히 칭찬까지 받아낸다는 게 너무 웃기다.
웃긴데 나 왜 눈물이 나지.
이 산책은 내 발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여전히 꼼 발아래에 있었다.
할 거 다 하고, 간식도 먹고, 칭찬도 받고.
내 눈에서 발사되는 하트까지 남김없이 싹.
아무래도 내 파트너는 똑똑하기를 타고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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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이 빠르게 머리를 선점하는 바람에 나는 자동으로 몸을 맡게 되었다.
타고나기가 둔해서 날렵 근처에도 못 가는 몸이지만, 묵묵하게라도 나의 머리를 떠받치는 중이다.
다른 건 몰라도 꼼과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백분 활용해 이곳저곳 부지런히 다니는 게 나의 목표다.
이유랄 게 있다면 우리는 둘도 없는 산책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걷기가 취미인 나는 꼼을 만나기 전에도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배가 불러서, 따분해서, 시간이 남아서, 날이 좋아서, 날이 곧 안 좋아진대서 등등.
온갖 이유를 산책하기 위한 핑계로 가져다 썼는데 꼼을 만나고부터는 핑계를 댈 필요가 없어져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땐 산책 지옥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내 산책 인생에 날개가 돋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꼼 덕분이다.
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꼼이 있어서 곱절로 신이 났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내게 꼼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모든 행선의 목적은 흐릿해지는 법이 없었다.
아무 때나 길을 나서도 모든 발걸음이 선명했다.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줄 하나가 가진 힘은, 무쇠처럼 무적이기에 나는 머뭇거리는 법을 몰랐다.
앞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만 강구했던 것 같다.
내 손에 잡힌 줄 끝에 꼼이 있어서 좀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줄을 매달고 꼼을 가둔 꼴이 될까 봐 내 근간을 흔들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꼼,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같이 가자는 거야.
꼼은 내가 나갈 준비를 하면 발밑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거나 내 발끝을 살짝씩 깨물면서 자기도 데려가라며 조르곤 한다.
꼼아, 너도 데려갈 거야. 걱정하지 마.
늘 말해주어도 늘 듣지 않고 나만 쫓아다니는 통에 꼼을 붙잡고 먼저 하네스를 채워 주면
나갈 준비를 마친 꼼은 비장한 자세로 한 곳에 앉아 있는다.
어쩔 땐 거실에, 어쩔 땐 현관에, 어쩔 땐 침대에.
두 다리에 자유를 얻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지만 효과는 미흡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스치는 시선에 걸리는 꼼이 얼마나 귀엽던지.
하네스를 채워 준 곳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꼼의 모습은
내 발밑을 졸졸 따라다니는 꼼보다도 강력해 내가 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귀여워서 안 되겠어. 찰칵찰칵. 누가 이렇게 귀여우래. 쪽쪽.
준비가 늦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뭘 해도 귀여운 꼼 때문에 진작에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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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끝부터 꼬리털까지 안 귀여운 구석이 없는 꼼은 귀엽기도 모자라 의리까지 갖췄다.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내게 이런 완벽한 파트너가 생겨났는지.
물론 화들짝 놀라는 상황에서는 날 버리고 도망가 버리기는 하지만,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니깐 서운하기는 해도 파트너로서 점수가 깎이지는 않는다.
튼튼한 두 팔로 번쩍 안아다가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게 이 몸이 할 역할이기도 하고.
우리가 맺은 산책 협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기>다.
그래서 나는 길을 찾거나 꼼 사진을 찍을 때 외에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는다.
이는 꼼도 마찬가지다.
꼼은 내가 신발 끈을 고쳐 매거나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지키고 서 있는다.
내가 무방비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런 때에는 재촉하는 법도 없다.
딴짓하던 것도 멈추고 내 곁에 다가와 나를 지켜주곤 한다.
그리고 꼼은 길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과 내가 대화(주로 꼼을 보고 다가온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나를 올려다보면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묻는 몸짓을 보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게 내 눈에는 다 보인다.
나를 올려다보다가 괜히 내 발밑 주위를 살피고, 내 발부터 시작해 다리를 킁킁거리며 주의를 끈다.
눈이 마주치면 꼬리가 살랑살랑. 이제 다시 출발해 보자는 눈으로 살랑살랑 마음을 흔든다.
우리가 가려던 분명한 목적지(나무 25)가 궁금해도 대화가 마무리되어 내가 “가자.”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 먼저 가는 법이 없다.
이미 목적지(나무 33)에 도착해 냄새를 맡다가도 누가 내게 말을 걸어오면 냄새 맡는 걸 그만두고 내게 다가오는 꼼이니까 꼼이 나를 지키려 한다는 생각들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다 같이 우르르 산책길에 나선 날이면 꼼의 의리력은 한층 더 상승하기에 이른다.
챙겨야 할 가족이 늘어 애당초 냄새 맡는 것도 포기하고 온 가족을 살피기 바쁘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처지는 사람은 없는지,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갈 건지, 방향을 튼 걸 모르고 혼자 딴 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를 진두지휘하면서 산책을 이끌어 나간다.
우리 사이에 간격이라도 벌어지는 순간에는 꼼에겐 비상사태나 다름없다.
앞선 사람을 쫓아갔다가 뒤처진 사람에게로 돌아가느라 발이 네 개라도 부족한 모양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다.
갔던 길을 다시 오고, 왔던 길을 다시 가면서 지치는 건 꼼과 줄로 이어진 나 하나다.
우리가 맺은 산책 협정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안이 <절대로 줄을 놓지 않기>이기 때문에
줄로 이어진 나 하나만 갈수록 초췌해지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여기서 힘이 빠지는 건, 가족들과 다 같이 함께한 산책길에서는 꼼이 종종 나를 잊는다는 것이다.
늘 줄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따로 챙기지 않아도 잘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나와는 그동안의 산책으로 단련을 해 와서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챙김의 영역에서 나를 완벽하게 제외한 꼼은 내가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도 나를 찾는 법이 없다.
꼼아, 나는..?
줄을 넘겨주고 혼자 다른 길로 빠져도 꼼은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가족을 챙기기 바쁘다.
저 녀석. 내가 비록 10분도 안 돼서 돌아갈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잠시 빠졌다가 돌아왔는지도 모를 꼼을 안아주면서 “너 아까 나 버리고 가더라.” 투정을 부려보아도
초반부터 열일해 지쳐버린 꼼이 내는 소리라고는 거친 숨소리밖에는 없다.
미안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내 어깨에 기대는 것으로 보아 내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갈 걸 알았다는 듯한 태도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아서 날 두고 간 건가.
내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알아서.
꼼은 한결같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몸만 자라는 것처럼 몸은 자랐는데 행동은 그대로다.
아직도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띠디디딕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발을 씻고선 제일 먼저 침대로 달려가 장난감에게 돌아왔다는 인사를 한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공 세리머니를 펼치고
설거지가 끝나는 소리가 나면 미지의 세계에서부터 다다다 달려와 우유를 바란다.
설거지하는 동안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설거지가 마무리되는 타이밍에 맞춰 어느새 내 뒤에 와 있는 꼼을 보고
이래서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더 얻는다고 하는구나 알았다.
부지런한 꼼은 우유를 더 얻었다.
한편, 한결같은 꼼은 여전히 천둥을 제일 무서워한다.
지금도 천둥이 치는 바람에 진동 모드가 된 꼼을 품에 안고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매해 만나는 천둥인데도 천둥 앞에서는 용감 모드가 발동되지 않고 오로지 진동 모드만 켤 수 있나 보다.
그나마 발전된 게 있다면, 천둥을 8년째 겪으면서 꼼은 천둥이 치기도 전에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뜬금없이 덜덜덜 떨고 있는 꼼을 보고 아, 이제 곧 천둥이 치려나 보다 알았다.
덜덜덜 덜덜덜.
(천둥이 칠 거야.)
꼼은 천둥이 치거나 낯선 실내에 들어가면 ‘무릎 좋아 개’가 된다.
평소에는 무릎에 올라와도 금방 내려가면서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도통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그래서 지금 나는 덜덜 떠는 꼼을 달래는 척 꼼 몰래 사심을 채우는 중이다.
자꾸만 올라가는 비열한 입꼬리를 잡아끌면서.
(눈치 챙겨. 꼼 떨고 있잖아. 씰룩씰룩)
아, 꼼은 올해가 되어 변한 게 한 가지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병원을 적응하는 데 약간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했었는데 올해 들어 세 번에 한 번 꼴로 떨지도 않고 의젓하게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 씩씩하게 진료를 받으러 들어간다.
내가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변한 걸 보면 그새 자랐나 보다.
제 발로 진료실에 걸어 들어가는 개를 보고 유니콘 같다고 생각했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이젠 나의 개가 유니콘이 되어 있었다.
비록 꼼은 내 품에 안겨서 들어갔지만, 전혀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꼼을 본 다른 보호자가 자신의 개에게 “봐, 저 친구는 하나도 안 떨잖아.”라는 말을 하는 걸 듣기도 했다.
세상에. 원래 저 대사는 내 거였는데.
대사 속 ‘저 친구’가 ‘꼼’이 되는 날이 오다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 기특해서 “야, 똥꼬맹! 너 많이 컸다!”라며 놀려주었더니 꼼이 킁-하며 내게 코를 풀었다.
놀리면 콧물을 발사하는 걸로 보아
음, 역시 꼼은 그대로다.
꼼은 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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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 하나 없이 그대로인 꼼이지만,
올해 들어 꼼에게도 세월이 흘렀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몇 있다.
작년만 해도 꼼이 뛰는 속도를 못 따라잡았었는데 근래에는 꼼이 내 발에 맞춰 뛰는 날보다 내가 꼼의 발에 맞춰 뛰는 날이 더 많아졌다.
꼼과 뛰는 게 힘들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그러한 데다가 원래 소화 기능이 약하기는 했어도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는데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소화 문제로 병원을 찾기도 했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서 기력은 전처럼 회복되었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약을 챙겨줘야 하는 꼼이 낯설기만 하다.
꼼아, 약 먹을 시간이야.
꼼에게 건네는 여러 말 중, 이 말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벌써 몇 주가 흘렀고, 다행히 앞으로 5일 치의 약만 남았다.
이번 약만 먹고 꼼이 완치해 다시 병원에 안 갔으면 좋겠다.
올해 들어 외출도 잦고 여행도 잦았으니까.
어쩌면 꼼이 지치는 건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가 지속되어서 면역력이 약해진 것일 뿐이라고.
여행을 떠나면 쫓아다니는 건 내 몫이었는데 어느 날 문득 여행지에서 쉬고 있는 꼼을 기다리는 시간들이 길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앞으로는 돌아다니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을 더 늘려주어야겠지.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꼼에게 찾아온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체감을 한 이상 눈 감고 모르는 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다짐이 무색하게 꼼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탈이 났다.
탈이 난 꼼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면서 올 하반기의 목표로 단연 <꼼 컨디션 회복하기>를 꼽았다.
단순 컨디션의 문제인 건지 아닌지는 올 하반기에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한 꼼이 나를 앞질러 무한히 뛰어갈 때까지 마음껏 쉼을 제공할 테다.
그때까지 나도 체력을 올려놔야지.
나를 제치고 달려가는 꼼을 놓칠 수야 없으니까.
+ 다행히 꼼은 고맙게도 천천히 눈에 띄게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어제부로 끄으으으응- 소리를 내면서 나가자고 보채는 꼼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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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다니면서도 꼼은 내가 나갈 준비를 하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자기도 데려가라 한다.
자는 꼼을 깨워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놓은 적도 있는데 꼼은 그다음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쫓아 나갈 준비를 했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을 보면 나는 내가 짜증이 나는 걸 견딜 수가 없다.
꼼을 데리고 떠났던 여행이 내 욕심 같아서, 내 욕심 때문에 꼼을 아프게 만들었는데 꼼은 또 나를 믿고 따라온대서 화가 난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꼼 옆에서 어느 때보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뿐.
지금 꼼이 겪고 있는 아픔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될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꼼이 내게 베푼 수많은 호의와 도움을 그대로 되돌려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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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쓰다듬는 일은 언제나 즐겁지만,
아픈 개를 쓰다듬으면 눈물을 참기 어렵다.
만져달라는 대로 한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대로 세상이 멈췄으면 싶다.
손에 느껴지는 털의 감촉과 풍겨오는 꼼의 냄새,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 느리게 깜빡이는 눈의 움직임까지.
모든 걸 놓칠 수가 없어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웽!
(더 만져!)
꼼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겨 손길이 느려지자 꼼은 소리를 질러 내 정신을 깨웠다.
알았어. 제대로 만질게.
꼼의 호통에 눈물은 쏙 들어가 버리고 내 손놀림은 전보다 정성스러워져 있다.
웽!
(거기 말고!)
알맞은 응답은 아니었나 보다.
어딜 만지라는 거야, 대체.
여기?
웽!
꼼은 영원히 꼼이어서 상념에 빠져있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