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움: 대상에 대하여 꺼려지거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겁나는 데가 있다.
개가 무서웠던 적은 없다.
나를 해칠 리 없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굳게 자리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주변에 아는 개가 없어서 세상엔 온통 모르는 개뿐이었는데도 다 나를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길에서 우연히 개를 마주치면 눈으로 사랑을 말했으니까, 아마 개들 사이에선 내 소문이 자자할 거라고.
단 한 마리의 개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은 적 없었으니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정말로 그런 소문이라도 돌았던 건지 내게 사나웠던 개는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내게는 개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는 오랜 철칙이 있다.
사랑스러움을 마구 퍼뜨려 딱 한 번만이라도 쓰다듬어봤으면 좋겠는 개가 옆에 앉아 있더라도 꾹 참는다.
개에게 나는 그저 낯선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눈으로 사랑을 말하다 보면 개가 그 마음을 읽는 순간이 찾아온다.
모르는 개가 먼저 다가와 내게 엉덩이를 붙여 앉는 순간.
모르는 개가 먼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쓰다듬을 허락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이런 짜릿한 순간들이 나를 그 어떤 귀여움에도 기다리게 만든다.
이 정도 보상이면 개가 ‘그만’할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를 견딜 만하지 않은가.
때문에 개들은 다 나를 좋아하게 되어있다.
언제든 안아줄 준비를 하고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건 내가 가진 강력한 자신감이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갈지라도, 저 멀리 개의 형체만 보이더라도
그 찰나의 순간에 개의 안녕을 바라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온 세상 개를 예뻐하기도 바쁜데 무슨 수로 무서워하랴.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
딱 한 녀석만 빼고.
우리 집엔 맹수가 산다.
아주 무시무시한 3.3kg의 맹수가 살고 있다.
콧잔등을 씰룩거리면서 이빨인지 밥풀인지 모를 것들을 위협이랍시고 내보이는 맹수가 퍽이나 무섭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정작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오면 비웃기는커녕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싶을 정도다.
기세만 놓고 보면 3.3t은 거뜬히 넘어 보여 함부로 맞설 수조차 없다.
나도 내가 이 작디작은 녀석에게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꼼아 제발, 콧잔등을 좀 멈춰봐.
/
미리 이야기해 두자면 꼼은 문다.
꼼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가차 없이 물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꼼을 괴롭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꼼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너무 잘 알겠어서 변명을 늘어놓자면
나는 모든 게 처음인 초보 보호자였고, 개에겐 주기적으로 해줘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산책만 열심히 하면 장땡이겠거니 했던 나의 안일한 생각은 그냥 땡이었다.
귀 청소부터 시작해 발톱 깎기, 빗질하기, 항문낭 짜기 등등.
뭐 이렇게 하나같이 다 싫어할 것들뿐인지.
개랑 친해지라는 건지 멀어지라는 건지 모를 미션들을 해나가면서 당연하게도 나는 미운털을 얻었다.
처음 하는 일들에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하면서 그 와중에도 혼자 해보겠다고 온갖 난리를 쳐댔으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걸 잘 알아서 꼼의 불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어설픈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빗질하기와 항문낭 짜기는 이제 내게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다.
(귀 청소와 발톱 깎기는 내가 하려는 시늉만 해도 콧잔등 시동이 걸려서 전문가 선생님들께 맡기는 중이다.
병원과 미용실을 무서워하는 꼼은 신기하게도 그곳에 가면 모든 걸 허락한다고 한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다.)
이런 말을 내가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였으면 나는 나랑 안 논다.
놀기는커녕 쳐다도 안 봤을 것이다.
그런데 꼼은 나랑 놀아주는 걸로도 모자라 전반적으로 신뢰하기까지 한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용서가 빠른지.
꼼은 두고두고 미워하는 법이 없다.
여러 번에 걸쳐 오랫동안 용서할 줄만 안다.
맹수가 베푸는 자비일까.
/
꼼은 좋고 싫음을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알아서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아마 누구라도 꼼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면, 꼼의 <좋음>과 <싫음>은 다음과 같이 각각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좋음 1단계> : 약간 좋음.
양 귀를 뒤로 젖힌다. 흔들리는 꼬리는 덤.
이때 반응을 해주면 양쪽 귀가 번갈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청기 백기 쇼를 볼 수 있다.
<좋음 2단계> : 좋음.
혓바닥을 휘날리면서 등을 가져다 댄다. 등을 토닥거려 응원과 격려를 해달라는 의미다.
무엇에 대한? ‘꼼의 기분 좋음 상태’에 대한!
<좋음 3단계> : 매우 좋음.
옆으로 누워 잔다. 꼼은 기분이 좋으면 지칠 때까지 뛰어놀다가 픽 쓰러져 잔다.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인데도 어쩐지 생기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싫음 1단계> : 약간 싫음.
눈이 작아지고 혓바닥을 날름 거린다.
되도록 무슨 짓이든 간에 이때 그만두는 것이 상호 간에 좋다.
<싫음 2단계> : 싫음.
으르르르 소리를 내며 콧잔등을 씰룩거린다.
작은 움직임조차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피워 위기를 넘겨야 한다.
<싫음 3단계> : 매우 싫음.
와앙! 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와’가 길어질수록 화가 많이 났음을 의미한다.
‘와앙!’이 마지막 경고라면 ‘와아아아앙!’은 결투다. 아마 이 소리를 들었다면 이미 물렸을 가능성이 크다.
표면적으로 눈치챌 수 있는 꼼의 감정은 이렇게 총 6단계다.
하지만 깊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다면 그 가운데 더 미묘하고 세밀한 수많은 감정이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대단한 건 꼼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감정이 대체로 평온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꼼은 좋고 싫음을 내게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 밖의 다른 감정들은 크게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꼼을 보고 배웠다.
자신의 좋고 싫음을 정확한 때에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으려면 웬만한 좋고 싫음은 삼켜야 한다고.
3.3kg의 꼼은 배우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내가 꼼을 ‘맹수’라 부르고, ‘자비’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
일례로 꼼은 발을 밟혀도 화내지 않는다.
항상 내 옆에 꼼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걷지만, 간혹 스텝이 꼬여 꼼의 발을 밟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꼼은 파바박 소리를 내며 내게서 한 열 발자국쯤 멀어지고는 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대치의 순간이다.
이미 한 차례 놀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극은 주지 않는 것이 좋다.
나는 이럴 때 보통 반성의 의미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꼼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전에는 내가 더 놀란 마음에 꼼의 발을 확인해 보고자 다가갔다가 단숨에 싫음 2단계로 건너뛴 적이 있었다.
그날의 교훈을 바탕으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알아서 놀란 마음을 추스른 꼼이 내게로 다가와 자기는 이제 괜찮다며 등을 내어준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살살 쓰다듬어주기만 하면 그날의 화해는 그걸로 끝이다.
발을 밟기 전의 평온했던 때로 돌아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산책을 이어 나간다.
꼼은 실수와 고의를 구분해 낼 줄 아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촉을 가지고 있다.
실수로 발을 밟으면 용서해 주지만 고의로 발톱을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발을 만지는 게 단순히 쓰다듬기 위해서인지 발톱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지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촉은 유독 내게만 혹독한 것 같다.
잠자는 꼼의 코털을 건드린 최초의 사람이어서 그런 걸지도.
일부러 건드리고 싶어서 건드린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럼 미운털이 박혀 있어도 속은 뻥 뚫린 것 같을 텐데.
꼼의 머릿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 건지, 가끔은 말도 안 되게 의심의 눈초리로 대할 때가 있다.
아무런 꿍꿍이도 없는데 마치 나의 사악한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굴면,
나도 억울해 이왕 의심받은 거 빗질이나 한번 해주련다 하게 된다.
이 수까지도 모두 내다봤을까.
부엌에서 내가 만드는 게 나를 위한 건지 꼼을 위한 건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알아차리는 꼼이니까
몇 수를 먼저 내다본 것일지도 모른다.
꼼은 내가 몸을 들썩거리는 것만으로도 화장실을 가려는 건지 산책하러 나가려는 건지 구분해 낼 줄 안다.
이것도 사실 가끔은 자기 맘대로라 화장실에 가려 했던 건데 자꾸 산책이라고 우겨서 몇 번 끌려 나갔다 온 적도 있지만
대체로 꼼의 섣부른 예상은 신통방통하게 적중하는 편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몸짓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꼼은 내 행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고
이 정도의 눈치라면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도 가뿐히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기대하는 바이다.
다른 개들에게 하는 것처럼 네게도 마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마음을 네가 다 알고 있기를.
/
개와 살면서 가장 무서운 건 죽음이 삶의 언저리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면서 나는 죽음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철없이 개를 보챌 때는 전혀 모르던 감정이었다.
내가 개를 바랄 때마다 늘 같은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짓던 엄마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너 나중에 보낼 때는 어떡할래. 엄마는 자신 없어.
꼼을 데려오고서야 그게 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나도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 정말 어떡하지.
우리가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죽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감도 못 잡겠었어서 흥청망청 꼼에게 마음을 다 주었다.
내 전부를 홀라당 꼼에게 넘겨주고서야 죽음이 눈에 들어왔다.
돌이키려면 내 전부를 잃어야 했다.
꼼이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이라는 걸 하게 된 날이다.
개와 산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선택해야 하는 중성화 수술을 앞둔 꼼과 내게 수술 동의서라는 거대한 산이 놓였다.
드물지만 마취에서 못 깨어나는 경우가 있어요.
수술 도중 사망할 수도 있음을 내가 인지했고,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수술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하면서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내가 서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생기는 유선종양이나 각종 자궁 쪽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말에 선택한 수술이었다.
나중에 생길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오늘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는 게 정말 꼼을 위한 게 맞나
마지막까지 망설여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병원도 꼼도 수술할 준비를 마쳤는데 준비가 안 된 건 내 마음뿐이었다.
평생 준비될 리 없는 불안한 마음은 누르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수술실로 꼼을 들여보냈다.
내가 기다린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병원에 있기로 했다.
혹시라도 날 찾으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깐.
한없이 꼼을 기다리면서 내게 개가 있다는 사실만 실감했던 것 같다.
내 삶에 개가 없던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내 삶에 꼼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깨달았다.
여러모로 큰일이었다.
다행히 꼼은 수술을 잘 마쳤고, 회복도 빨랐다.
결과적으로 수술을 하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그 후로 꼼은 병원을 무서워하게 되었지만, 꼼이 내게로 무사히 돌아왔으니깐 얻은 게 훨씬 컸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준비될 리 없는 선택들 앞에 서야 하겠지.
아무쪼록 꼼이 나를 좀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내 곁에 꼼이 있어 주기를.
꼼만 있다면 무서울 게 없다.
무서워도 견딜 수 있다.
//
개가 무서웠던 적은 없다.
나를 해칠 리 없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굳게 자리하고 있다.
개를 향한 믿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개를 향한 마음은 더 크고 복잡해져서 이제는 개가 무섭다.
개가 잘못될까 봐 무섭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혹은 누군가의 실수로 한순간에 개들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게 겁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될까 봐 그게 제일 두렵다.
내가 손쓸 새도 없이 꼼이 잘못될까 봐, 나의 신중하지 못한 선택으로 꼼이 다칠까 봐 매일이 가시밭길이다.
이런 사서 하는 걱정들이 나를 갉아먹는대도 멈출 수가 없다.
신호를 위반한 자동차를 피한 것도,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내려오는 자전거를 비껴간 것도
다 사서 한 걱정들 덕이어서 사방에 둔 의심의 눈을 거두지 못하겠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사고를 예방하려면 내가 예민해지는 수밖에는 없다.
이 정도 보상이면 신경이 예민해져 두통이 올지라도 세상을 지켜볼 만하지 않은가.
이건 내가 가진 강력한 다짐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꼼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다짐.
꼼 뿐 아니라 온 세상 개가 제 명을 다 살았으면 좋겠다.
온 세상을 다 누렸으면 좋겠다.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억울하지 않기를.
이건 단 하나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