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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바다를 선물하기

설렘: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

by 위드꼼



바다와 산이 붙으면 바다가 백날 이긴다.

꼼이 오고부터 이따금씩 산을 찾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 부동의 1위는 바다다.


바다의 매력은 <무한함>에 있다.

바다 저 멀리, 바다 저 아래에는 오직 바다만이 알 수 있는 미지로 가득해서

내가 아무리 바다를 쫓는대도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다는 점이 나를 바다로 이끈다.


무한한 바다 앞에서 나는 ‘한낱’이 된다.

무한한 바다 앞에서 나는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내가 될 수 있다.


/


바다가 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어린 시절, 야근을 하고 돌아온 아빠는 자고 있는 우리들을 깨워 밤새 바다로 떠나는 일을 좋아했다.

집에서 바다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장장 4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잠에서 덜 깬 채로 비몽사몽 앉아 있으면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모습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든 나까지 챙겨 들고서 우리는 야반도주하듯 바다로 떠났다.


분명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던 날들의 기억은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두고 간 선물 같았다.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선물이 내겐 바다다.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여서 나를 언제든지 그날의 바다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담요에 꽁꽁 둘러싸여 수평선 너머 태양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던 그날의 설렘 앞으로.


//


꼼과 떠나는 첫 여행을 바다로 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18년 6월 27일 나는 처음으로 꼼에게 바다를 선물했다.



와, 바다다!



바다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 이유는 엄마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는 내게 세상을 감탄하며 볼 수 있는 눈을 물려주셨다.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자세를 바로잡다가 마침내 넓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면

어김없이 엄마는 “바다 나왔다!”라며 기뻐하곤 했다.


엄마의 기쁨 어린 감탄을 신호 삼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 바다다!”를 외치는 게

바다를 맞이하는 우리만의 세리머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는 빼먹으면 괜히 섭섭하다.

흥이 오르려다 마니까 찜찜하다는 게 더 맞겠다.


그날의 여행 역시 우리들의 세리머니로 시작되었다.


나름의 리듬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와, 바다다!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에 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우리의 화두는 [바다를 처음 보는 꼼]이었다.


지금은 꼼 정보 데이터베이스 작업이 완료 단계에 다다라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대도 데이터에 기반해 대처할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꼼에 대한 정보가 0에 가까울 때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기승전모르겠다로 끝이 났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가 싶으면 저러고 저런가 싶으면 이래서 한동안 나는 꼼을 배우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꼼은 예측만으로는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꼼을 알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나서야 했다.

이럴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저럴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각종 데이터를 쌓으려면 일단 움직여야 했다.

바다로 떠나기로 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해마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바다를 봐야 하는 내겐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꼼에게 달려있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꼼이 바다를 보고 질색을 하면 나는 어떡하지.

만약에 혹시라도 꼼이 바다로까지 가는 여정을 힘들어하면 나는 어떡하지.


이기적인 나는 사실 꼼을 걱정하기보다는 나를 걱정했다.


꼼이 이번 여행에서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내색을 보인다면

다음 여행을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꼼과 바다가 붙으면 꼼이 백날 이길 거라는 걸 나는 알았다.


/


안다는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알겠어서 싫지 않은 건 개가 처음이다.


나는 항상 잘 모르겠을 때 마음이 갔다. 이제 알겠다 싶으면 곧바로 다음을 물색했다.


자전거가 타고 싶었고 자전거 타는 법을 다 배우고 나면 인라인스케이트에 눈이 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킥보드에서 자전거로, 자전거에서 인라인스케이트로 옮겨 다녔다.


삶 전체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피아노에서 장구로, 장구에서 바이올린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내게 무엇이 남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가 없다.


전부 흐릿한 얼룩으로 남아있어서 이미 떠나버린 흔적을 두고 ‘여기에 있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 딴청 할 뿐이다.


그런데 개는 다르다.

이제 개라면 다 알겠는데 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알아도 알아도 궁금하고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마냥 설레기만 하던 여행길에 걱정이 추가되었는데도 기쁘다는 게 참, 말이 안 되는 건데

그걸 개는 해낸다.


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내게 주렁주렁 매달린 ‘걱정’이란 혹들이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밉지가 않다.

평생을 달고 다니래도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얼마든지 대환영이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난생처음 거대한 바다 앞에 선 꼼의 반응은…


꼼아, 바다야!


와, 바다다! 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내가 사랑하는 개가 만나는 순간’

무척이나 감격 그 자체여서 남몰래 설렜던 게 무색할 만큼 현실은 달랐다.


무척이나 뻘쭘했다.

그냥 드넓은 운동장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근데 물도 있는.


꼼은 오프리쉬가 가능한 운동장에 데려가도 구석구석 냄새를 맡고 나면 가만히 앉아있는 스타일이라

해변에서도 냄새를 좀 맡나 싶더니 풀썩 앉아 탐색하기를 그만두었다. 근데 또 하필 바다를 등질 건 뭐람.


질색하며 도망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꼼도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척거렸다.


꼼아, 너 뒤돌면 바다야.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니.


멀뚱멀뚱 나만 올려다보고 있는 꼼에게 바다를 아무리 소개해 줘봤자 눈에 들어올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우리는 바다보다 서로를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꼼이 바다를 좀 봤으면 좋겠는데 계속 나만 보고 있어서 “꼼아, 나 말고 바다를 봐.”라며 나는 꼼만 바라봤다.


꼼의 눈이 바다보다 깊어 하마터면 빠져나오지 못 할 뻔했다.




우리라는 바다



꼼은 바다엔 별 관심이 없지만 바다가 내뿜는 냄새는 흥미로운 모양이다.

(난 이걸 놓치지 않고 내 맘대로 바다 냄새는 바다에서 나니까 바다를 흥미로워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바람이 불어와 코끝에 바다가 스치면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꼼의 콧구멍도 같이 이동한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오직 코로만 냄새를 쫓아 마치 코가 도망을 가는 모양새다.

도망가려는 코를 다시 잡아 오고 또 도망가고 있는 코를 잡아 오는 동안 들썩이지 않는 엉덩이가 용하다.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게으르다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꼼은 앉은자리에서 바다를 다 파악한 것 같아 보였다.


큰 파도가 철썩여도 닿지 않을 경계에 앉아 모든 걸 통달한 무심한 고수 같다고나 할까.

이미 상대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굳이 마주 보지 않아도 모든 움직임을 감지하는 무림의 고수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바다를 보기만 해도 덜덜 떠는 하수가 아니기만을 바랐는데 이렇게까지 초고수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이로써 나는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내가 바다를 지킨 건지 꼼이 나를 지킨 건지 바다가 꼼을 지킨 건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꼼의 짐까지 챙길 수 있게 되었단 거다.

걱정보다는 설렘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다 사랑 제2막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꼼과 나는 그날 이후로 동해, 서해, 남해 구분 없이 부지런히 바다로 향했다.


봄 바다, 여름 바다, 가을 바다, 겨울 바다

쨍쨍한 바다, 안개 낀 바다, 비 내리는 바다, 눈 내리는 바다

고요한 바다, 성난 바다


모든 바다를 꼼과 함께했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꼼을 보며 호강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호강하는 건 나다.

꼼이 없었다면 있었는지조차 모를 곳들이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만 다니던 내가 새로운 길,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게 된 건 다 꼼 때문이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꼼의 세상이 넓어져서, 세상에 깃발을 꽂는 마음으로 돌아다녔다.


깃발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마다 꼼의 세상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라고.

나의 세상도 꼼 만큼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을 꼼에게 돌리고자 한다.


가방을 꺼내 짐을 쌀 때마다 가장 먼저 스스로를 챙기는 꼼이 아니었더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나서는 게 아니라 앞장서겠다는 꼼 때문에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또한 꼼이 정말 탄 게 맞는지 재차 확인할 정도로

차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배에서 얌전히 있어 준 꼼에게 모든 걸 바치는 바이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마다 바짝 긴장한 내가 우스울 만큼 잘 적응해 준 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 나만의 우물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 다니는 코를 쫓아 이리저리 신나게 움직이는 꼼에 모든 힘듦을 잊었다.

낯선 방에 누워서도 나만 있으면 다 괜찮다는 듯이 정신없이 자는 꼼에 모든 어려움을 잊었다.


나의 바다가 여기에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가까이에 나의 바다가 있었다.


//


내게 바다가 있다면 꼼에겐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해 보고자 시작한 글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꼼의 바다를 찾아 헤맸지만,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기승전모르겠다에서 벗어나 있을 줄 알았는데.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데이터로도 알 수 없다는 점이 나를 꼼에게로 이끄는지도 모르겠다.

꼼의 매력 역시 <무한>하므로.


꼼의 바다를 찾는 대신, 나의 바다를 하나 더 찾아버린 이 결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만 복잡해졌다.


다른 일이라면 “그거 내가 대신 해줄게.”라며 나섰을 테지만

바다 앞에서는 ‘한낱’ 나일 뿐이어서 꼼의 바다가 되어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대신, 바다 엇비슷한 건 되어주겠다.

나의 매력은 <유한함>에 있으니까.


꼼은 나를 꿰뚫고 있어서 굳이 찾지 않아도 내가 늘 옆에 있을 걸 알고 있다는 점 하나만을 내세워 어떻게든 버텨보겠다.


유한한 내 앞에서 꼼이 ‘한껏’이 되도록.

유한한 내 앞에서 꼼이 ‘할 수 있는 데까지’ 꼼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언제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언제든지 꼼의 곁에서.




꼼아,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평생 새로운 나무 냄새 맡게 해줄게.
나랑 평생 바다 보러 다니자.

-나의 바다에게, 너의 바다 엇비슷한 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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