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림: 마음이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괴롭다.
4월이다.
거짓말처럼 4월이 되었다.
4월 1일이 되면 만우절답게 세상이 온통 거짓말 같다.
새해 다짐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분기라니.
지난 3개월이 3일 같아서 믿기지 않은 채로 달력을 확인해 보지만 변함없는 ‘4’라는 숫자에 쓰린 마음을 달래는 데 하루를 다 보냈다.
이렇게 하루를 빼앗아 갈 거면 32일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31일도 모자랄 판에 30일이라니.
별게 다 아쉬운 4월이다.
겨울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나무들은 어느덧 싹을 틔우고 거리에는 꽃도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다.
기어코 봄이 오고야 말았다.
4월은 벚꽃의 달, 중간고사의 달, 과학의 달, 제주의 달, 장애인의 달, 도서관의 달, 국민 안전의 달···.
그리고 꼼에겐 두근두근
예방접종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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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은 1년마다 꾸준히 예방접종을 맞는다.
켄넬코프, 신종인플루엔자, 광견병, 종합백신, 코로나장염백신.
이렇게 총 5가지다.
4월 초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꽃들을 구경하면서 켄넬코프, 종합백신, 코로나장염백신을 맞히고
보름 후에 만개한 꽃들을 구경하면서 광견병과 신종인플루엔자를 맞히는
이 아름다운 루틴을 매년 4월마다 이어 나가고 있다.
(누구는 매년 이렇게 맞힐 필요 없이 피검사를 해서 항체가 없는 것만 골라 맞히면 된다는데
어차피 검사하기 위해 바늘을 찌를 거라면 그냥 주사를 맞히는 게 낫지 않나 주의다.
피도 뽑고 주사도 맞아야 하는 그런 불상사를 꼼에게 안겨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피 뽑는 건 무서워하는 반면에 주사는 아주 잘 맞는 꼼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주 화요일, 그러니까 거짓말 같던 4월 1일에
꼼은 활짝 핀 개나리와 산수유를 배경 삼아 1차 접종을 마쳤다.
다음 접종 땐 벚꽃과 목련이 만개해 있겠지.
깨갱 소리도 안 내고 아주 늠름하던 꼼이 기특해 돌아오는 길에 딸기 2팩과 참외 1봉지를 샀다.
그게 주사랑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묻는다면,
병원 가는 걸 무서워하는 꼼을 꼬시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랄까?
이 뽑으러 가는 어린이에게 돈가스가 있다면
주사 맞으러 가는 꼼에게는 과일이 있다.
이건 무해한 존재를 속이려는 유해한 존재들의 모의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생존 전략에 가깝다.
그러니 속였다기보다는 말을 아꼈다고 해두자.
병원 가는 걸 좋아하는 개가 있다는 소식을 SNS에서 접할 때면 마치 유니콘을 보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개가 있다니. 개의 탈을 쓴 유니콘일지도 몰라.
머릿속에 의심만 가득해 세상을 믿지 못하는 내 눈앞으로 유니콘이 저벅저벅 걸어가던 날에는
내 품에 안겨 더러러러러덜 더러러러러러덜 떨고 있는 꼼을 내려다보며 “지금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아?” 묻기도 했다.
어머나 세상에 개가 제 발로 진료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어디서 몰래 용감 열매라도 구해다 먹었나?
두 눈이 의심스러워서 꼼에게 재차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더러러러러덜 더러러러러러덜.
떠느라 제대로 못 봤단다.
/
꼼이 병원을 무서워하게 된 가장 강력한 계기는 ‘중성화 수술’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사 맞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인 터라 내 집 드나들 듯 접종을 끝냈는데
중성화 수술을 기점으로 병원을 악당들의 소굴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자칫 잘못하면 꼼짝없이 붙잡히고 말 거라고.
전날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자다가 하루아침에 수술을 앞둔 기분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쓰리다.
더군다나 아직도 내가 한패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서 쉴 새 없이 마음이 콕콕 쑤신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며 내게 SOS 신호를 보내는 꼼을 외면하는 일이란.
나의 임무가 진료실에 데려가기일 거라고는 평생 의심조차 하지 않을 꼼이어서 더 미안하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한 것도 나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여기서 믿음을 저버린 사람은 나 하나고, 앞으로 믿음을 저버릴 사람도 나 하나뿐일 텐데
계속해서 나만 믿는 꼼을 지켜보는 일은 꼼은 물론이고 내게도 정말 못 할 짓이다.
마피아가 되어 선량한 시민을 속인대도 이처럼 괴롭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너를 지목하는데 너는 계속해서 나를 살리는, 그런 어떤 미안함을 넘어선 부채의 감정에 가깝다.
꼼을 위한답시고 하는 일들이지만 정작 꼼의 의견을 들어보지는 못해서
해소되지 않은 마음의 빚이 쌓이고 쌓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날카로운 것들을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곱게 싸 건네면 그것도 사랑이랍시고 넙죽 받아먹을 꼼이라서,
내가 준 것이면 날카롭다는 걸 알고도 꿀꺽 삼킬 꼼이라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꼼 앞에서는 내 사랑이 온통 허울이 된다.
꾹꾹 눌러 담은 사랑은 조잡하기만 하고 밖으로 흘러넘치는 사랑조차 비겁하다.
꼼이 사람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죄책감조차 꼼에게 넘기려는 추한 속내가 툭 튀어나오는 순간엔 뭔 이런 xx가 다 있지 싶다.
꼼이 감당할 아픔에 비하면 소꿉장난에 불과할, 이런 내 아픔조차 작디작은 꼼에게 넘기려는 꼴이 참.
그나마 다행인 건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꼼의 떨림이 잦아든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줄로 알만큼 위풍당당한 기세가 남다르다.
이제 우리만의 안락한 요새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나의 바뀐 임무는 꼼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기.
마음도 가볍고, 발걸음도 가볍다.
평생을 하래도 하겠다.
건강을 사전에 관리하기 위해 꼼을 병원에 데려가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나의 잘못으로 인해 꼼이 병원에 가야 했던 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평생을 살아도 지워지지 않을 그날의 배경은 마침 우연이 주는 시린 겨울이었다.
봄을 몰고 오기 때문에 가장 혹독하다는 2월의 어느 날, 꼼의 목구멍에 껌 조각이 걸리는 사고가 벌어졌다.
나의 안일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안일하게 행동했던 나의 자만이 꼼의 목구멍에 탁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
사건의 시작은 하하호호.
꼼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바싹 마른 빨래들을 개던 중이었다.
꼼아, 이번 여행은 진짜 재밌었지.
꼼아,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갈까?
공중을 날아다니는 기분을 타고 재잘대던 목소리가 내 귀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와 기쁨의 연료가 되는 끝내주는 오후였다.
가만히 앉아 나를 지켜보는 꼼이 너무 예뻐서
아무런 탈 없이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가는 꼼이 너무 기특해서 껌을 하나 주기로 했다.
기분이다! 하나 더 먹어!
쓸데없는 변덕은 폭풍우를 몰고 온다고 했던가.
평소라면 껌을 잘게 잘라 씹기 좋게 줬을 나지만, 그날따라 껌 하나를 통째로 쥐고 씹는 기분을 맛보이게 하고 싶었다.
또 그날따라 껌이 2개 생겼을 때, 꼼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다른 개들은 신이 나서 막 어쩔 줄을 모르던데. (그놈의 SNS가 문제다.)
우연히 피드를 넘기다 보았던 개의 행복한 반응을 떠올리면서 꼼에게 껌을 하나 주고 또 하나 더 주었다.
껌 2개면 행복도 2배일까 싶어서.
꼼의 반응은 SNS 속 이름 모를 개와 다르지 않았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며 하나를 물고 침대로 올라가 코와 발을 합작해 숨기더니
다른 하나를 물고 이 방 저 방을 오가면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아 후다닥 바쁘게도 움직였다.
나는 그걸 지켜보면서 꺄르륵꺄르륵.
하나를 숨기는 동안 다른 하나가 도망갔을까 봐 다시 또 찾아와 확인하고 다른 곳에 숨기고를 반복하는 꼼을 보면서
행복 참 별게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껌 2개에도 이렇게 행복해하는 꼼에게 여태 껌 반 개씩만 주었으니.
꼼의 건강을 걱정한답시고 내가 빼앗은 건 껌 반쪽뿐 아니라 행복 반쪽도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한참을 왔다 갔다 하던 꼼은 이제 하나 정도는 먹어야겠는지 자리를 잡고 앉아 앞발로 야무지게 껌을 붙잡고 씹기 시작했다.
꼼아, 안 뺏어갈게 천천히 먹어.
개던 빨래도 마다하고 꼼을 지켜본 데에는 어떤 싸한 직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가 무섭게
꼼이 컥컥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목구멍에 잠깐 걸린 줄로만 알았다.
천천히 먹어.
밥을 먹다가도 컥컥거리고 물을 마시다가도 컥컥거리는 꼼이니깐 이레 있는 일처럼 잠깐 그러는 거겠지 하고
엄한 목소리로 꼼을 다그치는데 순간 몸이 튀어 나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어? 이상하다.
/
그 후로 어떤 생각들이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꼼을 안아 들고 -역시나 SNS를 통해- 전에 배워두었던 하임리히법을 하는데 기대하던 껌은 튀어나오지 않고
하얀 거품토만 계속해서 나왔다.
몸을 떨기 시작한 꼼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에 머금고 있는 토가 목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게 손으로 계속 빼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뛰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병원에는 대기자가 아무도 없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접수 마감을 한 후였다- 목에 껌이 걸렸어요! 하자마자
접수부터 진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간호사 선생님께 꼼을 넘겨주는 순간
아, 살았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의료진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도 한몫했겠지만 실은 꼼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병원에서만 나오는 ‘저 착해요’ 표정을 하고 있는 꼼에 저 녀석 살았구나 싶었다.
집에서 보았던 괴로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멀끔한 꼼이 간호사 선생님의 품에 안겨 있어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진료를 마친 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장 위급한 상황은 넘겼고 지금 상태로 보아 껌이 나오거나 넘어간 걸로 보인다는 소견과 함께 나의 꼼이 내게로 돌아왔다.
엑스레이상으로 어딘가에 걸린 이물질은 보이지 않는다고, 며칠 두고 보면서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병원에 가야 한다며 근처 24시 동물병원을 알려주셨다.
처음 겪는 일에 놀랐을 꼼을 다독거려 주시는데 얼마나 감사하던지.
이 자리를 빌려 고개 숙여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가출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몇 배로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맨몸으로 나온 꼼을 놓칠세라 꼭 끌어안으면서 다시는 안 하던 짓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또 어딘가에 눈이 멀어 너에게 해를 끼치는 날에는 나부터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피투성이인 내 손을 발견하고는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입안에 남아있는 거품을 밖으로 빼내려고 몇 번이고 꼼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는 동안
겁을 먹은 꼼이 손을 빼내려고 마구 물었었는데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입고 있던 옷은 토와 피가 낭자해 있었다.
우리 정말 사투를 벌였구나.
나로 인해 벌어진 치열한 흔적들을 치우면서 그제야 긴장이 풀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 울고 침착하다며 의사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는데
칭찬이 무색하게 샤워하는 동안 엉엉 울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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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랑 같이 사는 건 어렵지 않다.
엉덩이만 가벼우면 다 된다.
근데 개는 어렵다.
배워야 할 것도 챙겨야 할 것도 많다.
매일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 범위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게다가 현실은 복불복이라 시험 범위 중 어떤 일이 내게 벌어질지도 모른다.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우선 오늘은 하임리히법부터 배워두자.
내가 개에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쓰린 마음을 달래는 데엔 개와 관련된 지식 하나 배우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건 없으니깐.
*개를 위한 하임리히법
1. 뒷다리 사이로 팔을 넣어 엉덩이가 들리도록 개를 안아주세요. (머리가 아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기도에 걸린 이물질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등을 반복하여 세게 두드려주세요.
그래도 안 나온다면,
3. 무릎을 꿇은 뒤, 개의 뒷다리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아 주세요. 이 자세가 어렵다면 개를 배가 보이게 안아주세요.
(역시 머리가 아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손바닥을 이용해 배에서 가슴 쪽으로 반복하여 세게 밀어주세요.
5. 이물질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 주세요.
*대형견의 경우 사람에게 실행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1. 개의 뒤쪽에 서주세요.
2. 등 뒤로 손을 넣어 양손을 맞잡아 (압박이 가해질 정도로) 뾰족하게 만들어주세요.
3. 배와 가슴 사이의 들어간 부분을 반복하여 세게 눌러주세요.
4. 기도에 걸린 이물질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등을 반복하여 세게 두드려주세요.
5. 이물질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 주세요.
#유튜브에 개 하임리히법을 검색하면 여러 동영상이 나옵니다.
#동영상을 참고해 완벽하게 숙지해 두세요.
여담을 덧붙이자면, 꼼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숨겨둔 껌을 찾아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내가 이미 버렸다는 걸 모르는 채로.
꼼아, 여러모로 미안했어.
여담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꼼은 한동안 껌을 먹지 못했다.
껌은 잘못한 게 없었지만 꼴도 보기 싫어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두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철저한 감시 아래 다시 껌을 먹는다.
시린 겨울을 보내니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