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음: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하다.
어쩌다 ‘개’는 인간 세상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다른 동물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간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개를 손쉽게 폄하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역에 상관없이 통용되는 비속어인 ‘개xx’만 봐도 그렇다.
‘개xx’는 말 그대로 개의 새끼, 즉 강아지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걸 욕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인간 세상에서 개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개같은’이나 ‘개만도 못한’이라거나 ‘개보다 나은’과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계기로 개가 인간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는지.
개와 같아도 욕이 되고, 개보다 못해도 욕이 되는데 개보다 낫다는 말은 칭찬이 될 수 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개와 함께 사는 반려 인구수는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욕설에 섞는 ‘개’와 함께 살아가는 ‘개’를 분리된 카테고리에 저장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를 옆에 두고 인간을 욕보이는 건지 개를 욕보이는 건지 모를 말들을 내뱉는 이들이 놀랍기만 하다.
가까운 존재일수록 소중하게 대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선을 넘는 명분 중의 제일은 ‘친함’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개와 친해서 개를 함부로 대하는 것일까.
정말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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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뿐 아니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고받는 대화들에서 ‘개’는 심심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다.
개소리라거나 개망신처럼 나쁜 의미로 해석되는 말부터
개좋아나 개싫어처럼 의미를 곱절로 만드는 말까지 팔색조가 따로 없다.
근데 어이가 없는 건 ‘개’라는 말을 셀 수 없이 사용하면서도
정작 ‘개’를 두고서는 ‘개’라고 부르기가 어쩐지 꺼려지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욕설에 ‘개’라는 말이 섞이는 것도 기분이 나쁜데 그것도 모자라서 개에게 개라고 하는 것조차 불편해진 세상이라니.
‘개’ 대신 ‘강아지’라고 부르기로 전 국민이 합의라도 한 것처럼
언젠가부터 ‘개’는 ‘강아지’가 되어버렸고 ‘개’는 ‘개’를 잃어버렸다.
말과 망아지, 소와 송아지는 구별하면서 왜 개만 강아지인 걸까.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대화 속에서 ‘개’를 빼버리는 일이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걸까.
나는 개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의도적으로 모든 대화에서 ‘개’라는 단어를 빼기로 했다.
옆에 듣는 ‘개’가 있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개를 개라고 부르는 건 망설여진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주를 보고 ‘똥개’라 하지 않고 ‘똥강아지’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부르는 ‘강아지‘라는 말 안에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함축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나의 개를 귀엽고 사랑스럽게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의 개가 미움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뭔지 알아서 은근슬쩍 ‘강아지’ 대열에 합류하곤 한다.
그렇지만 나의 개에게만큼은 되도록이면 ‘개’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다 큰 강아지는 개라고 부르는 게 맞으니깐, 강아지라는 말에 담긴 의미보다 더 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깐
아무래도 내게 꼼은 개가 맞다.
개라는 말은 강아지라는 말보다 더 복잡하고, 복잡하게 마음이 간다.
온갖 마음이 쉴 새 없이 개에게로 향한다.
마음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마음 주기를 포기할 수 없는 것.
내게 개는 그런 의미다.
꼼과 나는 닮았다.(고들 말한다.)
꼼이 들으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기쁘기만 하다.
서로 닮아가는 것보다 값진 일은 없을 테니까.
길에서 마주치면 백이면 구십구 뒤돌아볼 만큼 빼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는 꼼과 달리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어서 양심에 찔리기는 하지만
닮았다는데 구태여 부정할 이유도 없어서 옳다구나 하고 넙죽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가 닮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낯을 가린다.
2.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3. 잠이 많다.
4. 호기심이 왕성하다.
5. 고집이 세다.
6. 길을 잘 잃는다.
7. 여행을 좋아한다.
8.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9. 수영을 못 한다.
10. 기름진 음식을 잘 못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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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꼼과 나는 낯을 가린다.
타고난 성격인 건지, 나와 살면서 물든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전자일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꼼이 내게 마음을 여는 데에도 수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같이 산 지 햇수로 2년 차가 되고서야 꼼이 이제 나를 완전히 믿기로 했다는 걸 알았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길래 그렇게 되었나 보다 했다.
재촉하면 부담이 될까 봐 ‘내 마음은 활짝 열려 있어. 넌 들어오기만 하면 돼.’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와 있더니 대뜸 문까지 잠가 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낯을 가리는 <낯가림 1+1>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2)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혼자 있는 게 제일 속 편한 ‘혼자 좋아 인간’과 따로 또 같이의 가치를 아는 ‘혼자 좋아 개’의 만남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꼼은 내가 거실에 있어도 혼자 방에 들어가서 논다. 혼자 놀다가 혼자 잔다.
그렇게 각자 떨어져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다시 심심해질 때쯤 서로를 찾는 식이다.
내가 꼼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날에는 (3) 둘이 꼭 붙어 끝없이 잔다.
어렸을 때부터 잠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자던 나는 지금도 ‘잠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내가 정한 ‘잠의 날’의 규칙은 단 하나. 개운할 때까지 잠을 멈추지 않을 것.
모처럼 날도 잡았겠다, 마음 놓고 늘어져 있으면 꼼도 내 옆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나의 내공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능력을 타고났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건, (4) 호기심이 잠을 이긴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잠을 설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인데
꼼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발동하면 잠도 잊는다.
좋아하는 잠도 날려버릴 만큼 호기심이 강력한 우리에게 (5) ‘고집’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저쪽 길로 갈 거야.
꼼과 나의 똥고집 대결은 주로 길 위에서 펼쳐진다.
팽팽하게 맞서는 꼼을 보면서 ‘그래, 내가 져준다’며 양보를 하지만 사실 이길 자신이 없다. (꼼에겐 비밀이다.)
(6) 길도 못 찾으면서 왜 자꾸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 건지.
지도 앱이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평생 집을 찾지 못해 유랑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7) 둘 다 여행을 좋아하니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도에 의지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는 둘도 없는 1+1이 되었다.
8년간 틈만 났다 하면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눈으로 보일 만큼 꼼이 여행을 좋아해서다.
조금이라도 (8) 싫은 내색을 했다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여행을 포기했을 텐데
망설임도 없이 자기도 가겠다며 잔뜩 신이 나 있는 꼼 덕에 나도 덩달아 엉덩이가 들썩여지는 바람에
계획에도 없던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이처럼 찰떡궁합인 개를 만나 좋은 게 백 가지가 넘지만 날 닮아 아쉬운 점도 있다.
(9) 우리는 수영을 못 한다.
나의 경우엔 물속에 들어가면 [수영을 한다]기보다는 [살려고 발버둥 친다]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꼼도 똑같은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개헤엄이 이 정도까지 요란할 수 있나.
슬개골을 단련하는데 수영이 좋다는 말에 야심 차게 풀빌라를 예약했건만 나 죽었소 하고 발버둥 치는 꼼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좋아. 쟤 그냥 나야.
그날 우리는 수영은 무슨, 산책이나 열심히 다니자고 합의를 보았다.
여행에서 벌어진 일을 계기로 우리가 합의를 본 건 하나가 더 있다.
고기는 삶아서 줄 것.
가족끼리 횡성으로 여행을 간 날이었다.
횡성이니만큼 한우를 구워 먹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꼼이 안쓰러워 기름기가 적은 부위를 골라 손톱만큼 잘라 준 게 화근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구운 고기의 맛을 잘 즐기는가 싶던 꼼은 돌아오는 길에 싹 다 게워 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설마 했다.
설마 (10) 기름기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는 늘 사람을 잡고 개도 잡는다.
그러고부터 한참이 흐른 후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더 작게 잘라 주었더니
꼼은 또 맛있게 받아먹고선 조금 있다가 바로 게워 냈다.
아니 이런 것도 닮을 일이야.
기름진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날 닮은 꼼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삶은 고기는 잘 먹으면서 구운 고기는 못 먹는 걸 보면 아무래도 기름기가 문제인 게 확실해 보인다.)
삶을 공유하는 김에 위까지 공유하기로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나의 위를 가져다 쓰고 있었던 건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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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꼼의 행동에 같이 살면 닮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다 적지 않은 것들까지 포함하면 꼼과 나는 닮은 구석이 참 많다.
구석구석 안 닮은 걸 찾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게 ‘개같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욕이 될 수 없다.
꼼은 나와 같고 나는 꼼과 같은데 어떻게 개같다는 말이 욕이 될 수 있겠는가.
사실인걸.
이제 남은 건 ‘개만도 못한’과 ‘개보다 나은’.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리다.
무엇이 맞고 틀렸는지는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의 경우엔 ‘개만도 못한’이 맞고 ‘개보다 나은’이 틀리다.
나는 개만도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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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살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개’의 이미지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야말로 한량의 대표주자였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도 있으니깐.
근데 그건 다 개를 모르고서 하는 이야기다.
개와 살아보니, 개는 베짱이가 아닌 개미에 속했다.
성실해도 너무 성실하다.
단 하루도 늦잠 자는 법이 없는 꼼은 시간을 쪼개가며 꽉 찬 하루를 보낸다.
혼자서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집안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꼼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저 머릿속에는 어떤 계획들이 자리 잡고 있어 저러는지 궁금하다.
부엌에 있다가 다다다다 침대를 올라가더니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말고 거실로 나와 한 번 쓱 둘러보고는 다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저러다 과로하는 건 아닌지.
거실 방바닥에 드러누워 꼼이 움직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나오다가도 괜히 찜찜해지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뭐가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 같은데 꼼은 원래 저랬고 나는 원래 이랬어서 기가 차다.
기가 막히는 건 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다.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알람이 필수인 나와 다르게 꼼은 알람이 없어도 아침 6시가 되면 벌떡 일어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더 대단한 건 침대를 후다닥 벗어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갈 수가 있는 건지 놀랍기만 하다.
좀 만 더 자고 싶어 알람을 5분 후로 미루고 있는 내 옆에 벌써 하루를 시작한 꼼이 앉아 있다.
이미 밥도 먹고 물도 마신 꼼의 눈에 아직 이불 안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내가 베짱이로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이제 일어나.
그 어떤 알람 시계보다도 정확한 나만의 알람 시계 역할을 해주는 꼼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개만도 못한’이라는 말에 기분 나빠할 수 있겠는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미 그러한걸.
나보다는 확실히 꼼이 낫고, 제발 꼼만큼만 성실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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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관련한 여러 저급한 말들이 생겨나게 된 까닭은 개를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개’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기 전 우후죽순 생겨난 무성한 말들을 미처 막을 수가 없어 지금까지도 오해를 풀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개를 잘 알게 된 지금, 이미 굳어진 말에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호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은 말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말이 내게로 왔을 때 올라타지 않으면 그걸로 절반은 성공했다고 본다.
말 위에 아무도 올라타지 않는 날이 오면 그 말은 저절로 힘을 잃게 되겠지.
목소리를 높여 대항하는 것보다 침묵의 저항이 더 강력할지 모른다.
개를 개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개가 개를 되찾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