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함: 어떤 것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이 허전하거나 두렵지 않고 굳세다.
개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거로도 모자라 내 알고리즘까지 전부 잡아먹었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물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부딪히는 개부터 모르는 사람의 무릎에 앉아 동행인 척 시치미 떼는 개까지.
온갖 개들이 휴대폰 속에서 요란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자칫 발을 잘못 담그기라도 하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라 늘 마음의 준비를 하며 화면을 올리지만
연달아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개들에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거는 순전히 개 탓이다.
할머니가 밀어주는 파도타기(공원에 있는 운동 기구 중 상체는 고정한 채 하체를 좌우로 움직이는 그거)를
즐기는 개를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냔 말이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앉아서 졸고 있는 개까지 등장하면 그나마 붙잡고 있던 이성도 전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눈앞에서 자고 있으면 지켜보는 게 사랑 된 도리지. 암만.)
한참 동안 -남의-개들을 들여다보면서 어머, 어쩜, 세상에, 이야 같은 감탄사에 흠뻑 젖어든 나를
단숨에 끌어올리는 것 역시 -나의-개다.
웡!
알았어. 그만 볼게.
꼼이 구한 나의 날들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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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꼼이 자러 들어갔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해 보자면 꼼은 그다지 든든한 스타일은 아니다.
애초에 개에게 든든하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혼자 두고 도망가 버릴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아주 재빠르게.
이제는 그런 상황들이 익숙해져서 ‘그래 너라도 살아라.’ 싶지만
아주 가끔은 감출 수 없는 야속함이 서운함과 손을 잡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너 정말 이러기야.
이름은 이미 꼼이라고 지었으니, 호를 바람이라고 하겠다.
너는야 바람 꼼 선생.
바람 타고 사라진 꼼의 역사는 길고도 깊다.
이게 딱 뭐라고 꼽기도 애매할 만큼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수많은 에피소드가 스쳐 지나갔지만 건져 올릴 만한 것이 마땅치 않다.
음. 고양이랑 살아본 적이 없어서 적합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고양이 같다고나 할까.
고양이가 자신만의 숨숨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꼼에겐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가 침대여서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순간이 닥쳐오면 두말하지 않고 침대로 도망가 버린다.
근데 그 이유들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이거를 참 꺼내놓기도 민망하다는 게 문제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장 최근의 일부터 말해보자면
서랍에서 국자를 꺼내다가 떨어트렸다.
쉽게 그려지시는가.
혹시 내 걸 하고 있는 건가, 부엌을 기웃거리던 개가 국자를 떨어트리는 소리에 놀라 침대로 도망가는 모습이.
이러니 호를 바람이라고 지을 수밖에.
이 밖에도 택배를 집에 들여놓거나, 박스테이프를 뜯거나, 소파 뒤를 청소하거나, 창고 정리를 하거나, 커튼을 달거나, 화분을 들어 올리면 꼼은 이미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다.
다시 집안이 고요해질 때까지 침대 위에서 숨죽이고 있기를 한참,
다 됐다 싶으면 거실로 뛰쳐나와 언제 그랬냐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낸다.
차라리 기죽은 채 나오면 안쓰럽기라도 하지.
장난감을 요란하게 흔들면서 마치 장난감을 찾으러 침대에 올라간 듯이 구는 꼼이 참. 더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나 할까.
스스로 생각해도 퍽 민망했는지 장난감을 내려놓고 등을 쓰다듬으라는 꼼에 부러 칭찬을 해주기도 한다.
그래. 잘했어.
/
쓸데없는 공상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나로서 꼼을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항상 마무리를 할 즈음엔 가슴께가 답답해지곤 한다.
정확하게는 가슴께가 답답해져서 상상을 그만두는 거라고 하는 게 맞겠다.
하. 이 험난한 세상에 얘를 어쩌면 좋지.
멀리 상상의 나라로 날아갈 필요도 없다.
고개를 돌려 현실을 보더라도 정신이 아득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덜덜덜 덜덜덜.
이 소리는 겁에 질린 꼼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리다.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종종 사다리차가 물건을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사다리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순간부터 꼼의 진동모드가 시작된다.
덜덜덜 덜덜덜.
꼼의 진동은 상황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는데,
집에서 겁먹었을 때가 덜덜덜 덜덜덜이라면
병원에서는 더러러러러덜 더러러러러러덜이다.
이걸 구분해 내는 것만으로도 꼼의 진동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꼼은 횡단보도에서도 떤다.
(이때는 리듬을 추가한, 더러덜 덜 덜덜.)
밖에선 당최 떠는 일이 없던, 겁이란 겁은 죄다 집과 병원에 벗어던지고 걷던 꼼이
더러덜 덜 덜덜 떨게 된 이유는 바로 <횡단보도 음성 안내>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아마 꼼이 우리 집에 오고 2~3년쯤 후에 하나둘씩 설치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횡단보도 앞에 선 꼼이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한 것도 대략 5년쯤 되었겠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신호를 기다리던 꼼에게 횡단보도 음성 안내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았을 것이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불까지 번쩍이니, 천둥 번개가 아닐 리 없지.
처음 만난 날부터 혼비백산하더니 그 후론 내가 품에 안고 있어도 좀처럼 진정되지가 않아 음성 안내가 나오는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나 역시도 긴장모드가 된다.
(횡단보도 앞에서 어떤 개가 사람의 품에 안겨 더러덜 덜 덜덜 떨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꼼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보행자용 신호등이 아닌 자동차용 신호등을 보고 있다면 그건 나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건 뭐 더 안전해진 세상을 탓할 수도 없고.
쫄보 둘이서 무사히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다리차도 마찬가지다.
윗집인지, 윗윗집인지, 윗윗윗집인지, 아니면 더 윗집인지도 모를 사다리차의 종착지에 찾아가 언제 다 끝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사다리를 올리기 전에 미리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뭘 해도 꺼지지 않는 진동을 끌어안고 안전지대인 침대 위에 같이 올라가 주는 것이 최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든든함을 찾는다고?
아파트 외벽을 칠하려고 내린 밧줄에도 덜덜덜 떠는 개에게 든든함이라니.
그거 다 내가 하고 말지.
내가 이 대사를 쓸 줄이야.
개랑 단둘이 산책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외진 곳으로 가게 되는 순간이 발생하곤 한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발에 치일 걸 걱정하랴, 통행에 방해가 될 걸 걱정하랴 마음 편히 산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한적한 곳에 도착해 있다.
<뭔데 또 입에 넣어> 사건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을까 꼼을 예의주시하며 걷느라
방향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눈 깜짝할 사이 꼼과 나만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만다.
여긴 누구 나는 어디..?
내 심장소리에 내가 놀라 자빠질 지경이라 이럴 땐 낙엽도 함부로 밟으면 안 된다.
머릿속엔 온통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해’ 뿐이고 꼼에게 말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온통 ‘킁킁 킁킁 킁킁킁킁 킁’ 뿐인
이 말도 안 되는 대치 속에서 또 언제나 백기를 드는 건 내 쪽이다.
저 정도면 다리가 다섯 개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코를 땅에 대고 걸어가는 꼼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그래. 까짓거 다 덤벼.
/
나의 이 허세는 괜한 것이지만 어찌 보면 정말로 무찌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게
꼼의 옆에만 서면 전에 알던 내가 아닌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구체적인 설명도 가능하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벌레.
고소 공포증, 폐소 공포증, 환 공포증을 다 물리치고 내겐 자타공인 벌레 공포증이 있다.
번지점프대에 올라가 본 적은 없지만,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벌레를 끌어안고 뛰어야 한다? 못 한다.
엘리베이터에 실제로도 몇 번 갇혀본 적이 있어서 얼마든지 문제없지만 그 안에 벌레도 있다? 끔찍하다.
동그라미들이 수천 개, 수만 개가 있어도 그만이지만 그게 다 벌레다? 으..
구체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벌레 공포증은 벌레 그 자체라기보다는 벌레가 가지고 있는 예측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벌레는 몇 시간이고 지켜볼 수 있는 반면,
그 벌레가 움직이는 데다가 내 몸에 달라붙는다면 그대로 숨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벌레가 내 몸과 꼼 몸에 닿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들여보내 줄 수 있을 정도니.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까.
같은 선상에서 나는 벌레를 죽이는 것도 하지 못한다.
맨손으로는 모기도 잡지 못한다는 걸 밝히면서, 내 소개는 이쯤 해 두겠다.
이런 내가, 거미를 내 손으로 잡느니 밤새 지켜보기를 택한 내가,
꼼이 오고 나서부터는 벌레 다 덤벼가 되었으니 뭐.
사람이야 뭐. 까짓거 뭐.
천 번이고 다시 물어본대도 벌레를 만지느니 평생 오리걸음으로 다니는 걸 택하겠지만
꼼이 벌레랑 같이 있게 두는 건 잠시라도 견딜 수가 없다.
개와 같이 사는 사람들은 이 타이밍에 이런 궁금증이 떠오르겠지?
그럼 여름에 산책은 어떻게 하는 거지?
정답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천변으로 산책을 다니다 보면 날벌레부터 시작해 정체가 뭔지 알고 싶지도 않은 다양한 벌레들이 꼼의 털 사이사이에 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있는데 그 친구들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떼어주다 보니 눈물이 마를 겨를이 없다.
꼼에게 벌레란 빵을 샀더니 따라온 띠부띠부씰 같은 거랄까.
(요즘엔 띠부띠부씰을 샀더니 따라온 빵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분명 꼼에게 빵만 먹으라고 했는데 온몸에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온 격이다.
(꼼 이 녀석은 나 몰래 띠부띠부씰 도감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나도 모를 여름방학 숙제가 있는 건지 아주 열심이다.)
평생 스티커를 붙이고 살라고 할 수도 없고 스티커를 붙인 채로 집에 데려갈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저것 좀 떼줄 수 있냐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오 마이 갓! 스티커가 움직이기까지 한다. 오메 나 살려. 아니 차라리 날 죽여.
한 번은 개미가 꼼 얼굴에 올라탄 적이 있다.
등이라면 몸을 털어내도록 했을 텐데 얼굴이라서 손으로, 그것도 맨손으로 잡아 길에 놓아주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엄마는 “야, 너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셨지만 사실 내가 더 놀랐다.
방금 나 뭐 한 거야?
한 번은 나무에서 송충이가 떨어져 꼼 등에 붙은 적도 있다.
꼼은 귀를 쓰다듬으면 몸을 푸다닥 털어내서 몇 번이고 쓰다듬었지만 그날따라 헤헤거리며 웃는 탓에
꾸물꾸물 거리는 송충이를 달고 다니는 개를 칭찬해 준 사람만 되었다.
칭찬에 힘입어 송충이는 꼼의 얼굴 쪽으로 방향을 틀고..
벌레는 이게 문제다.
마음은 다급해지는데 마음껏 동동거릴 시간은 주지 않는다는 것.
배변 봉투를 활용하자니 너무 얇고 막대기를 찾자니 눈에 안 보여
어쩔 수 없이 꼼을 세워두고 휴대폰 모서리를 사용해 살살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지도 못하고 제대로 쥐지도 못한 채 집까지 덜렁덜렁 들고 와 깨끗하게 씻었다.
마음 같아선 내 기억과 함께 그곳에 영원히 버려두고 싶었지만.)
이 정도면 그냥 시켜줘라.
꼼 명예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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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과 든든함은 아주 먼 이야기라는 건 이제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든든함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 어떤 것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이 허전하거나 두렵지 않고 굳세다.
그렇다면 꼼은 내게 든든한 존재가 맞다.
꼼이 나를 지켜줄 거란 믿음은 없지만 꼼과 있다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으니 그게 그거 아닐까.
내가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골목을 지키고 서 있는 이유도, 벌레를 손으로 만지게 된 이유도 다 꼼 때문이니 말이다.
꼼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바뀐 것 하나 없이 쫄보, 그 자체였을 것이다.
꼼과 있으면 못 할 게 없단 믿음으로 마음이 허전하거나 두렵지 않고 굳세다.
누가 뭐래도 이 명제는 참이다.
꼼과 거닌 나의 수두룩한 날들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