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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평생 개를 모르겠구나

화남: 성이 나서 화기(火氣)가 생기다.

by 위드꼼



엄마는 이따금씩 먼 산을 내다보며 “내가 꼼 때문에 살아.”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어쩌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날에 가만히 꼼을 보고 있으면 찬물을 확 끼얹는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그러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한숨과 함께 내게로 날려버리신다.


너는 꼼 때문에 내가 봐주는 줄이나 알아.


얌전히 앉아 옥수수를 먹다가 이게 웬 불똥이야.

앗 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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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F인 엄마가 쏟아붓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나는 어찌 된 일인지 극 T를 타고나 크고 작은 다툼들을 벌이고 있다.


언제나 공감이 우선인 엄마와 언제나 이해가 우선인 나는 평소엔 서로를 향한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똘똘 뭉쳐져 있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말릴 새도 없이 각자의 본성을 앞세워 날 선 공기층을 형성해 버리고 만다.


주제도 원인도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해, 평화롭던 하루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하나 그간 있었던 수많은 논쟁 중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살벌했던 것을 꼽으라면 그 중심엔 언제나 우리의 <꼼>이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꼼의 건강’을 소원으로 비는 우리 앞에 ‘아픈 꼼’이 놓이면 그것만큼 예민해지는 게 없어서

그간 쌓아왔던 신뢰는 뒤로 내던지고 “이중 나만큼 꼼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 상태가 되어 눈빛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도록 서로를 믿어왔다 하더라도 두려움과 불안 앞에선 장사가 없는 법이니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려는 나최악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마의 대립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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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을 수 없이 갈라지던 두 길은 결국엔 하나로 다시 만나며 끝이 난다.

처음부터 하나만을 바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꼼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하나를 놓을 수 없어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험난한 싸움을 계속해 나갈 듯싶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지긴 하지만.



무엇을 원하시나요



개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같은 마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모습의 개들이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양한 가족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당장 집 앞에 산책만 나가보더라도 사람마다 개를 대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걸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보호자의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

눈은 마음을 쫓기 마련이니까 애써 감추어 본다 한들 쉽사리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눈은 어떻게든 눈에 띄게 되어있다.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도 어떻게든 눈길을 끌기 마련이고.


남의 사정을 잠깐 보고 단박에 알아차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깐 다른 건 내가 전부 잘못 판단한 것이라 치더라도

제발 개와 산책을 나왔으면 자기 손과 개의 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식을 하면서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왕이면 뚫어질 듯 내려다보고 있는 그놈의 휴대전화도 좀 내려놓고.


멀티가 안 되는 사람으로서 개와 산책을 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걷는 사람이 제일 신기하다.

백번 양보해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문제가 있나 보다 넘겨짚으려 해도, 느긋한 태도로 보아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적어도 쭈욱 늘어나는 자동줄 끝에 자신의 개가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산책을 시켜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니까 이렇게라도 밖에 나와서 개가 콧바람을 쐰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다가도

아슬아슬하게 산책을 이어나가고 있는 개를 보고 있으면 뭐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산책 교육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랑 같이 집 밖에 나왔다는 조건 하나만으로 ‘개와 산책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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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져 있는 독일은 개를 입양하기 전, 개를 키울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개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세금을 걷고, 매일 산책을 나가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등

한 가정으로 입양이 된 후에도 개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보호하고 관찰할 수 있는 정책들이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의 땅을 누비고 있는 개들에겐 자유로움이 물씬 느껴진다.

줄 없이도 어디든 드나들고, 그런 개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연스럽다.


이처럼 개를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풀어놓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중요한 원칙이 필수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1. 나는 개를 키울만한 자격이 있다.

2. 나와 개는 전문기관에서 산책 훈련을 마쳤다.

3. 개를 보호해 주는 법안이 마련되어 있다.

4. 다른 사람이나 다른 개를 공격할 일이 없다.

5. 다른 사람이나 다른 개가 내 개를 공격할 일이 없다.

6. 내가 부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곁으로 돌아온다.

7. 개가 어디든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8. 내 개로 인해 벌어진 모든 상황에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

9. 내 개에게 벌어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10. 내겐 내 개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위 사항을 전부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개를 마음껏 풀어두도록 하자.


그게 아니라면, 얼른 줄을 챙겨 개를 보호하자.


자유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때나 발생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잠시나마 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가 자유를 맛보았다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오산이다.


오히려 개를 위험으로 몰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안전불감증의 심각성을 깨닫고, 줄 하나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 더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개는 안 문다는 둥, 줄로 묶어놓는 게 불쌍해서 그렇다는 둥, 원래 개들은 풀어놓고 키워야 한다는 둥.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이런 변명들도 이제 그만 듣고 싶다.


내가 내 개를 자신의 무책임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걸 지켜보는 게 못마땅한지 불쑥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내 귀에는 그 어떤 변명도 그저 ‘개를 쫓아다니기 귀찮아서’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 개가 아니라 당신이었겠죠.






개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다치지 않고 안전하기를.)


개에게 이것 말고 더 바랄 게 있나.



뭐부터 해줄까요



개랑 살다 보니 대략 5번의 커다란 감정 굴곡을 지나게 되었다.

앞으로 몇 번이 더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8년 간 충분히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한다.

(느닷없이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못된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처음엔 꽃밭이었다.

세상은 푸르르고 내 옆엔 개가 있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다음으로는 당황스러움.

왜지? 왜 가만히 있는 개에게 시비를 거는 거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탐구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딱히 호칭을 정하기도 애매하니까 ‘그들’이라고 하자면, 그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분포해 나를 떨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아주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으로 나를 절망에 빠트렸다.


개가 옷을 입고 있으면 입고 있다고, 개가 옷을 벗고 있으면 벗고 있다고 뭐라 해서 그들끼리라도 합의를 봤으면 좋겠다.

짖는 개에게는 짖는다고, 안 짖는 개에게는 안 짖는다고, 걷는 개에게는 걷는다고, 안겨있는 개에게는 안겨있다고.

아마 개가 앉아있으면 앉아있는다고 뭐라 하겠지.


무턱대고 걸어오는 시비를 넘어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만나면 삽시간에 놀람으로 넘어간다.


개에게 위세를 떨치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코앞에서 발을 구르는 사람, 손에 들고 있는 우산을 휘두르는 사람, 멀쩡한 박스를 내던지는 사람 등.

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그들의 움직임을 내가 먼저 포착해 꼼이 맞기 전에 피해서 큰일은 면했지만 그때 다친 마음들이 회복되지 않아

덧나고 덧난 상처가 분노로 나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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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악에 받쳐 살아갔던 것 같다.

뉴스에서만 보았던 동물학대범을 충분히 길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눈에 불을 켠 채로 벼르고 다니던 시기였다.


반복되는 무례함으로 사람에겐 충분히 실망할 만큼 실망한 상태여서 더 나빠질 것도 없겠다 싶었는데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에 내가 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만큼 나를 더할 나위 없는 구렁텅이에 빠트린 건 세상이었다.


자기보다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잘못이 없는 동물들을 학대하는 것도 화가 치미는데

피해 대상이 동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죗값이 너무도 볼품없어서 꼼 앞에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무력감이라고 정의하는 게 맞을까.

정확하게는 해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뜬금없이 꼼의 산책을 방해하는 사람을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만다.


꼼의 하루가 그들로 인해 망쳐지지만 않으면 됐다.


내 기분이야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 거고.

꼼이랑 있으면 그건 일도 아니니깐.


개와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개를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에 맞서 분노와 해탈 단계를 끊임없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개와 보내는 소중한 산책 시간을 그대로 날려버릴 수는 없으니

길에서 만난 무례함을 떨쳐버리기 위한 마법의 주문 하나쯤은 가슴속에 심어두기로 하자.


내가 지은 마법의 주문은 이거다.


저 사람은 평생 개를 모르겠구나.


어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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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 때문에 산다.


꼼 때문에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졌다.

혐오에 맞서, 폭력에 맞서 세상이 좀 더 산책할 맛 나도록.


무기력함이 몰려오는 날엔 다 때려치우고 막살고 싶어 지다가도 꼼을 보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다.

꼼이 나만 보고 있어서 그런 꼼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 편한 길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겐 내 개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최선을 다해 꼼을 지키고 싶다.


꼼의 세상이, 그리고 개의 세상이 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전했음 싶다.

자유로움은 그럴 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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