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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개가 잘 지냈으면 정말 좋겠네

당연함: 일의 앞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

by 위드꼼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기른다는 말이 있다.

눈 하나 깜빡하면 몇만 원이, 눈을 비비면 몇십만 원이, 눈물이 눈앞을 가리면 몇백만 원이 통장에서 사라진다.


생명이 살아가는 일을 값으로 셈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돈의 세계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들로만 꽉꽉 채워주고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안할 뿐이다.


무엇보다 병원비가 가장 걱정이다.

돈이 없어 제때 필요한 치료를 해주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한구석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고 또 한구석에선 그 바람에 가장 좋을 날을 아깝게 흘려보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들로 잠 못 이룰 때도 많다.

내일의 두려움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제에 내가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가 해서.


오늘의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해 보아도 불확실한 미래에 사정없이 무릎을 꿇게 되는 건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까짓 무릎이야 모조리 해져도 그만이지만,

변변치 않은 나 때문에 꼼도 같이 고생한 건 아닌지 생각만 하면 이게 전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좋았을 날들을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던 건 아닌지.


그런데도 자꾸만 오늘의 행복내일의 안정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중이다.

두 마리 토끼를 몽땅 손에 쥐려면 지갑에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하는 건지 통 모르겠다.


가슴으로 낳아 가슴으로 기를 수는 없나.

행복과 안정을 포기하는 대신 ‘나쁘지 않음’ 정도는 평생 보장해 줄 수는 없는 일인가.


야속하다.


//


그래도 후회스러운 날보다 좋았던 날들이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았다고 믿고 싶다.

후회는 훌훌 털어내 버릴 만큼만 했기를.


그래서 꼼이 다 잊어버렸기를.



평범한 나날들



내가 느끼기에 반려생활거대하고 위대한 미로 같다.

정처 없이 헤매고 다녀도 출구가 보이질 않는다.


보다 정확한 설명으로는, 잘 걷다가 한 번씩 말도 안 되게 높다란 벽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게 꼭 땅에서 솟아난 것만 같달까.

좀 전만 해도 아무런 장애물이 없던 평탄한 길이 하룻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마치 넌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매정한 길이 사방으로 꽉 막혀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에 바닥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하고 있으면 꼼은 내게 새로운 퀘스트를 하나 툭 던져준다.

그걸 겨우 풀고 나면 맞는 길이 나오지는 않고 새로운 미로로 나아갈 수 있는 힌트가 들어있다.


난이도도 모양도 제각각인 것들이 줄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게 셀 수 없는 미로들을 지금껏 수도 없이 지나와서 이번이 몇 번째인지도 가늠이 안 된다.

앞으로 몇 개가 남았는지 역시.


그럼에도 무작정 헤매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인 이 길이 지겹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나를 위한 미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미로는 개를 위한 것이고,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헤쳐나가고 있음을 알아서 힘이 난다.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일에 갈팡질팡하고 있으면 나도 그런 적 있다며 손 내밀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

내가 하는 고민과 걱정들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 평범하다는 걸 확인받는 것만큼 위안이 되는 일은 없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구나 하는 반가움꼼만 이러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내려앉으면 불안함이 걷히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바로 보게 되는 것 같다.

눈앞에 불쑥 솟아난 벽도 그러는 데엔 이유가 있을 테니깐.


반려생활이라는 미로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이상,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를 일으킨 손 역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던 적이 있을 거라는 걸 알기에 가만 두고 볼 수가 없다.


어설픈 나의 손이라도 사방으로 내밀게 된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은 그러라고 두 개인가 보다.

한 손으로는 누군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누군가를 붙잡아주라고.


/


개와 함께 미로를 돌아다니다 보면 처음 보는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순간이 평범한 나날들처럼 찾아오곤 한다.

일련의 과정이 억지스럽지는 않고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간단하게 인사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개와 같이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얻게 되는 것들이다.

주변의 동물병원과 미용실이 어떠한지, 새로 생긴 놀이터의 위치와 가면 안 되는 풀숲 등의 이야기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번엔 꼼과 공원을 거닐고 있는데 어떤 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며칠 전 이곳에서 산책을 하다가 개의 발바닥에 풀씨가 박혀 한동안 고생했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안 그래도 산책을 다녀오면 발바닥 털 사이에 엉켜있는 풀씨들이 종종 보이던 참이었다.

그것들이 발바닥을 파고드는 성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밖에 다녀왔다는 기념품을 챙겨 온 거냐고 꼼을 귀여워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그분 덕에 알게 되었다.


이름 모를 저 개가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기꺼이 내밀어진 손이었다.

그와 같은 손들이 나를 (그리고 꼼을) 여태껏 키워내고 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자라날 수는 없다는 말을 꼼을 키우면서 깨닫는 때가 많다.

반려생활에 있어 아직 부족한 나를 여럿이 번갈아가면서 보살펴 주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들과 같이 믿음직스러운 손을 당연하게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막연한 바람에 앞서 서투르지 않고 섬세한 손을 가꾸어내야겠지.


기껏 내민 손이 꽝이 될 수는 없으니까..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나는 순간이 하나 있다.


빵을 사러 가게에 들어간 엄마를 꼼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모녀가 다가와 주변을 서성거리기를 한참,

무슨 영문인가 하고 있을 때에 눈물을 머금은 딸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강아지랑 인사를 좀 나눠도 될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 왔어도 그런 머뭇거림과 조심스러움은 처음이어서 나도 덩달아 머뭇거리는 발걸음을 뗐던 것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쪽에서도 이런 나의 불신을 눈치챘는지 급히 설명을 덧붙여 왔다.


무지개 다리를 건넌 제 강아지랑 너무 닮았어요.



얼굴을 비비고 껴안아 주던 것



머릿속을 헤집던 모든 의심을 거두고 한걸음에 다가갔다.

태어나 한 번도 떠나보낸 적이 없어 그게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꼼을 만지는 손길이 마치 꿈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보였다.

꿈이 깨어질까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한참을,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한참을 우셨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내리는 것이 아니라,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혹여 내가 볼세라 황급히 닦고 나면 다시 한 방울이 뚝-하고 떨어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하는 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남몰래 마음에 담아두어야만 했던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게 흘려보내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울지 말라고 다독여주어야 했을까, 마음껏 울라고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나.

무엇이 제대로 된 위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은 후회가 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섣부른 손이라도 내밀어야 했었을까.

그랬다면 덜 슬플 수 있었을까.


해가 바뀌고 이제 더는 함께 살던 집안에서 개가 지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도 그들의 개는 영원히 그곳에 있었다.

그들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모습으로.


여기에 전부 담을 수는 없지만 그때 나눈 대화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 알았지?


헤어지는 길에 꼼에게 해준 말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엄마와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나누지 못했다.

분명 나눠야 할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로에게 꺼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도 나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무슨 말 끝에 흘려보내듯이 막연한 대화들을 주고받았던 적은 있다.

개를 떠나보낸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최대한 두리뭉실하게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슬며시 꺼내놓았다.


꼼을 앞에 두고 숙연해지지 않는 게 목표였다.


엄마는 꼼이 마지막이야.


이별이 두려워 시작도 하지 않으려 했던 엄마는 여전히 다가올 이별을 두려워하는 중이다.

TV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면 잘 보고 있다가도 재빠르게 채널부터 돌려 버린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슬픔을 넘기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로 엄마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니까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개가 없었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것도 자신이 없다.

내 남은 인생에 개가 없다면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얼굴을 비비고 껴안아 주던 것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대체 무슨 힘으로 살아가야 하지.

지금과 같은 행복은 영영 느끼지 못하겠단 생각에 벌써부터 우울하다.


아마 난 단 하루도 못 버틸 것이다.

꼼 없이는 단 일초도.


/


사람들과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해보면 대체로 둘로 나뉜다.


엄마처럼 개를 떠나보내는 게 두려워 자신의 인생에 개는 딱 한 마리뿐이라는 사람

나처럼 개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도무지 자신이 없어 계속해서 반려생활을 이어가려는 사람.


지금 당장의 생각으로는 평생토록 후자의 입장을 유지하지 않을까 싶지만

또 막상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나 역시 엄마처럼 무슨 수를 써도 이별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꼼이 아닌 다른 개와 시름없이 웃을 수 있을까.


이건 의리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문제다.


자신이 넘치는 상태에서도 어려운 게 나 아닌 다른 생명을 책임지는 일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어느 한쪽에 마음을 가만히 두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단 모든 건 덮어두고 꼼에게 최선을 다하자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해서는 안 되니까.


꼼과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일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잘 해냈으면 좋겠다.

내게 있어 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값이다.


//


참 알 수 없는 마음이다.

개를 보고 있으면 정체가 모호한 마음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내게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다른 누군가에게서 내게로.

내게서 다시 내게로.


개에게서 온 마음이니까 개가 준 마음인데, 그걸 도로 개에게 돌려줄 수는 없다.

개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이것뿐이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기왕이면 그러하겠다는 확답도 받고만 싶다.

세상의 모든 개가 잘 지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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