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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 일: 개의 귀여움을 견디기

괴로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

by 위드꼼



밤새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는 단 한숨도 잘 수 없다.

빗소리가 그칠 때까지 사시나무 떨듯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꼼이 있어 단잠은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렇게 나는 3일 연속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가면 갈수록 거대해지는 천둥소리에 꼼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품에 안겨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안아주기만을 바랐다.


발버둥에 가까운 몸을 끌어안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여서 날이 밝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 같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으로 무섭게 퍼붓는 이 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기를.


/


번개와 천둥은 함께 움직이지만 한 번에 오지는 않아서 꼼은 새벽 내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번개가 먼저 번쩍하면 나 살려라 계단을 내려가고, 그다음에 찾아온 천둥소리에 놀라 다시 후다닥 올라오기를 수차례.

종국에는 계단을 올라올 힘이 남지 않았는지 침대 아래에 앉아 끙끙거리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 좀 올려줘.


첫날 밤은 안쓰러웠고, 둘째 날 밤은 걱정이 되었다가,

셋째 날 밤은 괴로웠다.


꼼아, 이제 그만 내려가. 어차피 다시 올라올 거잖아.


절박한 나의 외침도 하늘이 번쩍하는 순간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쓰다듬던 손길도, 다급히 막아선 팔도 뿌리치고는 이미 어디론가 순간이동해 버린 후였다.


그러고 나면 곧장 우르르 쾅쾅.


나 좀 올려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독한 밤이었다.


//


마지막 날이 되자, 나는 우연히 꼼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몸을 둥글게 말아 꼼의 몸 전체를 덮으니 헐떡이던 숨이 금세 제자리를 찾아 안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5분이 되었을까.

어둑했던 하늘에 점차 빛이 차올랐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도대체 왜



개랑 지내다 보면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타이밍에 땅을 칠 때가 많다.


왜 하필이면 지금 손 닿는 데에 휴대폰이 없어서 저렇게 귀여운 순간을 놓치게 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장기를 두는 신선처럼 앉아 있는 꼼이 웃겨 겨우 카메라를 찾아 들면 신선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와 다름없는 꼼이 화면 가득 들어와 있다.


아까처럼 앉아보래도 요지부동 말을 안 듣는 꼼을 찰칵.

사진첩엔 온통 그런 사진들뿐이다.


비보이 자세로 귀를 긁고 있는 꼼 대신에 바로 앉은 꼼.

두 발로 서서 묘기를 부리는 꼼 대신에 바로 앉은 꼼.

하트 모양으로 손을 구부리고 엎드려있는 꼼 대신에 바로 앉은 꼼.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사진들이 너무 많다.

그걸 딱 하나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찍었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겠다.


집안 곳곳에 CCTV를 달 수도 없고.


눈에 담으면 기억을 사진으로 인화해 주는 서비스는 언제쯤 생길까.

열 일 제쳐두고 그것부터 당장 구독하러 갈 텐데.


/


내 눈에만 저장되어 있는 장면들 중에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자고 일어나 나를 발견한 꼼의 모습이다.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다가 기다리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부스스 일어나 걷는 건지 기는 건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

마저 오지는 않고 서너 뼘쯤 앞에서 쭈욱 쭉 기지개를 켜는 게 꼼의 루틴이라고 할 수 있다.


엉덩이는 들어 올리고 앞발 먼저 꾸욱 눌러 몸을 늘리고 나면 뒷발을 하나씩 뒤로 펼쳐 각선미를 뽐낸다.

모든 동작이 끝났으면 엎드린 채로 앞발을 번갈아 콩콩콩콩 하는데 그 리듬에 맞춰 나도 같이 콩콩콩콩 하면 슬금슬금 곁에 다가온 꼼이 내 손에 얼굴을 비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여러 번 벌어지는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꼼이 일어나는 타이밍에 맞춰 카메라를 설치할 수도 있겠으나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냥 꼼이 매일 눈을 떠 나를 그렇게 맞이해 줬으면 좋겠다.


먼 훗날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도록.


그런데 그런 바람은 있다.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기를.


꼼도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제삼자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두 팔을 쭉 펴고 서로를 향해 손을 콩콩콩콩 움직일 때 주로 드는 생각이다.


아, 이거 누가 안 찍어주나.

두고두고 보고 싶은데.






그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꼼은 일찌감치 깨달은 모양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끈덕진 시선에 뒤를 돌면 뚫어져라 나만 보고 있는 꼼이 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살갑게 말을 걸어도 꼬리만 살랑이고 움직이지는 않는다.



아무런 말도 없는 거야



개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보고 있는 걸 수도 있는데 괜히 추궁당하는 기분이 들어 하루를 빠르게 복기하곤 한다.


뭐지. 뭘 안 해줬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한참을 대치하다 보면 절대로 지지 않는 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어 기가 죽을 판이다.

이리 오라는 유혹의 손짓도 거부하는 태도가 참으로 꼿꼿하기 그지없다.


나가고 싶어?

산책 갈까?

물 마실 거야?

기분이 안 좋아?

기분이 좋아?

공 가지고 놀래?

뭐 어떡할까?

밥이 모자라?

밥 줄까?

웡!


30분 전에 밥을 먹고 후식으로 블루베리까지 챙겨 먹은 개는 어디로 갔는지.

기어코 3차까지 끝낸 꼼은 부른 배를 이끌고 자리에 누웠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배가 고팠던 거였나 보다.


그렇다고 바로 그렇게 시선을 거두나.

등 돌릴 것까진 없잖아.


/


대체로 꼼과의 소통은 규칙적인 생활패턴으로 원활히 진행되지만 가끔은 끝날 것 같지 않은 스무고개가 펼쳐지곤 한다.

위의 상황처럼 원하는 게 확실히 있는 날에는 가족오락관이 따로 없다.


아무리 꼼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정답을 모르겠다.


이참에 버튼을 누르면 미리 녹음해 둔 말(산책 가자, 배고파, 간식, 주세요 등)이 나오는 장난감을 살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면 온 집안이 꼼이 내는 버튼 소리로 가득할 것 같아서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안 그래도 요구사항이 많은 꼼에게 버튼까지 쥐여주면 새벽부터 일어나 알람처럼 버튼을 누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딸깍-배고파 딸깍-배고파 따딸깍-배고ㅍ딸깍- 배ㄱ딸깍-ㅂ딸ㄲ…


으,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신난다고 얼마나 눌러댈지 벌써부터 괴롭다.


차라리 스무고개가 낫지.

답답하긴 해도 정답을 맞히는 쾌감이라도 있으니까.


손을 번쩍 들어 찬스를 쓰고 싶을 정도로 오답만 쏟아내다가 설마 이거..? 하는 마음으로 내뱉은 게 정답이었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별 건 아닌데 되게 대단한 걸 해낸 기분이다.


그날 나는 개가 방으로 자러 가자는 말을 현관 앞에서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밤중에 나가자는 건 줄 알고 말리기 바빴는데 자러 가자는 거였다니.


밖에서 자려고?


물어보았지만, 내가 드디어 알아들었다는 것에 심취한 꼼에게 나의 질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모로 가도 목적을 이뤘으니 됐다만 근데 왜 현관이냐고 꼼아.


개가 버튼을 누르면 속마음이 툭 흘러나오는 건 어디 없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리 상상해 보자면 대충 이런 것이다.


왜 그러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속마음 버튼을 개 앞으로 쓱- 내밀면 표정의 변화가 없는 개가 손을 들어 올려

딸깍-이유는 없어 딸깍- 이유가 필요해?


음.

이건 필요 없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었네.

안 살래, 안 사.


//


하루 종일 종종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꼼을 보고 있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래도 꼼이 가장 귀여운 순간은 자고 있을 때다.

아무래도 자고 있을 때 가장 애틋해 보이는 건 만물 공통인가 보다.


곤히 잠든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은 없으니까.

바라보는 것만으로 서서히 사랑이 차오르는 것 같다.


근데 또 반면에, 침대에 누워 잠든 꼼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깨우고 싶어 미치겠다.

놀아달라고 한바탕 달려들 땐 제발 그만 멈추고 잤으면 좋겠는데 막상 자니 깨우고 싶은 건 무슨 이유에선지.


산 넘고 물 건너지 않아도 구할 수 있는 내 속마음 버튼에서는 아마도 이런 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딸깍-

누가 귀여우래?


/


밤하늘을 장악하던 천둥번개가 모습을 감추자 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는 내가 움직여도 따라 나오지 않고 두 손을 곱게 포갠 채로 잘만 잔다.


무방비 상태로 배를 다 내놓고서 꿈에서 달리기라도 하는지 발을 까딱이는 꼼에 손이 근질거리는 걸 겨우 참고 있는 중이다.

마음속에선 벌써부터 우르르 쾅쾅 난리가 났다.


못 견디고 깨웠다간 번쩍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겠지.


딸깍-무서우니까

딸깍-얼른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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