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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가느다란 눈에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다

찜찜함: 마음에 꺼림칙한 느낌이 있다.

by 위드꼼



때때로 무언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공놀이를 하는데 내가 공을 주워 오고 있다거나,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별안간 스치는 소름에 몸서리가 쳐진다.


꼼아, 숨으면 좀 찾으라고!


술래 경력 8년 차에 접어든 꼼은 이제 집안에서 하는 숨바꼭질에는 도가 트였다.

딴짓하는 틈에 재빠르게 몸을 숨기면 익숙한 듯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찾는 걸 포기하고는 바닥에 풀썩 엎드려버린다.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는 타닥타닥 소리를 들으며 혹여나 들킬까 숨죽이고 있는 것도 잠시,

오라는 꼼은 안 오고 불쑥 찾아온 정적에 놀라 고개를 슬쩍 내밀면 거기 있을 줄 알았다며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꼼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만다.


이거 원, 나 여깄다 꾀꼬리도 아니고.


//


공놀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거실에 앉아 부엌을 향해 공을 던지면 날아가는 공을 쫓아 부리나케 달려간 꼼이 의기양양 입에 물고 돌아오는 것도 몇 번,

반복되는 뜀박질에 금방 흥미를 잃은 꼼은 맨입으로 털레털레 돌아와 공이 없어졌다며 능청을 떤다.


나보고 주워 오란 소리다.



용의주도한 전략가



본능적인 감각과 관찰력이 뛰어난 개는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는 데 있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가 무섭게 현관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내게 알려준다거나

내가 혼자 나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나가려는 것인지를 옷을 채 갈아입기도 전에 정확히 구분해 낸다.


이런 탓에 꼼에게 눈속임을 한다는 건 속 보이는 장난이나 다름없다.


깊은 잠에 빠져있으면 조심스럽게 곁에 다가와 뽀뽀로 깨우다가도, 이미 깨어있으면서 자는 척을 하고 있으면 가차 없이 거친 손길로 눈을 후벼파버리니 말이다.


실눈 한 번 뜨지 않고 꾹 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꼼은 다 알고 있다.


여기서 더욱 의문인 건 눈이 번쩍 뜨이는 고통에 벌떡 일어나 거울을 확인해 보면 그 흔한 발톱 자국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은 주지만 흔적은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한 전략가가 분명하다.


얼마 전 저녁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급히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꼼이 아는 척을 해와도 마음과 힘을 다해 안 보이는 척 굴던 중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꿈쩍하지 않자 인내심에 다다른 꼼은 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아 주의를 끌더니 옆에 쌓아둔 책탑을 코로 건들기 시작했다.


책 냄새를 맡는 척하면서 코로 툭.

책 구경을 하는 척하면서 코로 툭.


균형이 무너져 꼼이 다칠까 봐 나는 결국 겨우 버티던 걸 포기하고 꼼을 무릎에 데려와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팔 하나를 꼼짝없이 꼼에게 붙들린 채로.


잠꾸러기야, 너 왜 이럴 땐 안 자는 거야.


/


꼼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으면 데굴데굴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에 다 보이게 행동하면서 숨기고 싶은 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제일 큰 의문은 대놓고 앞에 떡하니 앉아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다란 내가 안 보였을 리가 없을 텐데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무방비하다고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조금 전까지 내 손길을 받으며 앞에 앉아 있었으면서 나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흐름에 탑승해 무아지경으로 발을 핥기 시작한 꼼은 일정한 동작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불현듯 나와 눈이 마주치고, 그제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 꼼은 슬그머니 발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면서 안 그런 척 뻔뻔하게 연기를 한다.


속아 넘어주기에 딱 좋은 눈을 하고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잘못했을 때만 나오는 개의 가느다란 눈에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담겨 있다.

그리고 개는 자신의 눈빛 한방이면 단호했던 마음도 흐물흐물 풀려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혼을 내기도 전인데 이미 배를 보인 채로 꾸물꾸물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니.

안 넘어가고 배길 수가.


그럼 나는 그때 가서 꼼의 발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못 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들인다.


어디 보자.

아주 정성스럽게도 핥아놨네.


사과를 괜히 받아주었다.






평화로운 일상 가운데 난데없이 서늘한 기운이 감돌면 백발백중 개가 가느다란 눈을 하고 있다.

그 눈만 아니었어도 몰랐을 텐데 손을 들어 자진신고하는 셈이다.


착실하기도 하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귀가 뒤로 넘어가고 머리를 땅에 닿게 하여 배가 보이면 뭐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저예요, 저

제가 그랬어요.


다른 건 다 따라 하면서 왜 거짓말은 못 따라 할까.

이슬처럼 투명한 눈이 마음을 붙잡는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너 뭐 했는데.



엄격한 관리자



꼼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만 하는 루틴이 있다.

루틴이라고 해야 할지 습관이라고 해야 할지 구분은 명확하지 않지만 빼먹는 날이 없을 정도로 꾸준하다.


이를테면 큰일을 보고 나면 휴지로 닦아달라고 하기.


내가 보고 있는 경우, 휴지를 들고 있는 내게로 다가와 닦아달라며 엉덩이를 내민다.


(간혹 놀던 중에 볼일을 본 경우에는 아직 흥이 남아있어 나를 지나쳐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도 하는데,

“꼼”하고 부르면 다시 돌아와 닦아주기를 기다린다.)


내가 못 본 경우에도 어물쩍 넘어가는 법이 없다.

누가 봐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와 자신이 처한 찝찝한 상황을 생생하게 알려주곤 한다.


더더군다나 어찌 된 영문인지 꼼에게는 내게로 와 닦아달라고 요청하는 습관이 한 가지 더 있다.


다름 아닌, 양치.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꼼은 자다가도 일어나 내게 양치를 하자고 한다.


양치 도구와 함께 자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밥 몇 알을 챙겨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으로 폴짝 착지해 자세를 잡는다.

오독오독 밥을 맛있게 먹고 양치하기 편하도록 알아서 고개를 뒤로 젖혀 누울 자세를 취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매끄럽다.


윗니 아랫니 꼼꼼하게 닦고 난 다음, 미련도 없이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쭉.

엄격한 관리자인 꼼의 주도 하에 하루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된다.


/


그리고 하루 중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습관들도 있다.

분명 그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분하게도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꼼의 계단 이용법이다.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긴데 과장 없는 사실만을 자세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 일단 내가 눕는다.

- 내가 누우면 꼼이 나를 따라 침대로 올라온다.

- 내 곁에 한참을 누워 있던 꼼은 두고 온 거실이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지 침대를 내려가 집을 탐색한다.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바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것 같다)

- 모든 탐색을 마치고 나면 다시 방으로 들어와 계단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 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부른다.

- 자신을 안아 침대로 올려 줄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틴다.


도대체 왜?


조금 전까지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개는 거실에서 바꿔치기라도 당한 건지 계단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개가 계단 아래에 앉아 있다.


꼼아, 올라올 줄 알잖아.


나의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만 올려다볼 뿐이다.

마음이 흔들리도록 애처롭게.


다음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은 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경우다.


꼼을 바닥에 두고 나 혼자 의자에 앉아 있으면 바닥 탐색을 모두 마친 꼼이 자신을 안아달라며 손을 내미는데

그에 응답해 안아 올릴 자세를 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망간다.


꼼, 일로 와. 올려줄게.


나의 부름에도 저만치 달아나 어떻게 자신에게 그럴 수 있냐는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게 다 의자 위에서 안으려 하지 말고 의자 아래로 내려와 안으라는 소리다.


도대체 왜??


//


한 번 마음먹은 개를 이기는 방법은 없다.

대신에 개가 어떨 때 그런 마음을 먹는지 알아내는 방법은 있다.


우리 모두 개에게서 배우지 않았는가.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능력은 부지런한 관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자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내게로 다가올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의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꼼을 기다리면

모든 의심과 경계를 거둔 꼼이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내게 안긴다.


이처럼 꼼의 눈높이로 몸을 굽혔을 때 비로소 보이는 꼼의 표정들이 있다.

편안하고 느슨한.


그럼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로 꼼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모로라도 가야지 별 수 없다.

굽히는 것도 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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