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함: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가뜬하다.
꼼의 목욕 주기는 대략 2주 전후다.
얼마나 꼬질한지에 따라 달라지기는 해도 씻겨야 되겠단 생각에 달력을 확인하면 얼추 들어맞는다.
2주를 향해가거나, 2주를 넘어섰거나.
그럼 그로부터 2-3일 정도의 유예기간을 두고 <목욕하는 날>을 달력에 적는다.
꼬질꼬질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웬만하면 단 며칠이라도 벌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꼼, 너 이날 씻을 거야. 마음의 준비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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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이 나의 예고를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나의 행동으로는 대강 눈치를 채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했던 당일이 되면 마음이 해이해져 산책길에서부터 티가 나기 때문이다.
물웅덩이를 첨벙거려 배가 축축하게 젖어도 따라 웃고, 전봇대건 풀숲이건 몸을 비벼 털 사이사이를 더럽혀도 못 본 척해준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말렸을 텐데 가만히 놔둔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꼼은 전과 다른 대범함을 보이기도 한다.
신이 난 엉덩이 힘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머뭇거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꼼에게 이끌려 산책을 당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주 낯선 털덩어리와 대면하게 된다.
얘를 어떻게 안아 들지?
누가 봐도 즐거운 산책을 마친 개를 품에 안는 일은 그야말로 난감하다.
도저히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몰골의 꼼은 도가 지나치게 해맑은 구석이 있다.
최대한 안 닿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엉거주춤 들어 올리면, 몇 걸음 떼보기도 전에 똑바로 안으라며 발버둥을 치는 꼼이 아무래도 수상쩍다.
너 일부러 그랬지?
그럴 때의 기분은… 마치.. 음.. 나의 업보구나…싶다.
진흙은 못 밟게 할 걸.
그 길로 가는 게 아니었는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서야 제대로 확인하게 된 만신창이의 행색에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꼼아, 우리 이러고 돌아다닌 거야?
누가 볼세라 서둘러 문을 열고, 욕실로 직행해 꼼을 내려놓으면 3초도 안 돼서 욕실 바닥이 까만 발바닥 자국으로 뒤덮인다.
하네스를 벗겨주자마자 몸을 터는 꼼에 사방으로 까만 먼지들이 휘날리고.
…
…
신호탄도 발사되었겠다,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아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덕에 이제는 정형화된 <꼼의 목욕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미끄러지지 않는 발판을 깔아 두고 꼼을 그 위에 앉힌 후, 욕실 선반에서 샴푸와 린스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다.
2. 꼼에게 기다려! 를 외친 후 재빠르게 욕실 밖으로 나와 털 말리기 도구를 세팅한다.
(상을 펴고, 그 위에 수건을 깔고 빗과 드라이기를 설치해 놓으면 완성)
3. 손톱깎이를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간다.
4.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짧게 깎는다.
5.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꼼에게 칭찬을 해주고 재빠르게 항문낭을 짜준다.
6. 몸에 물을 뿌려 속 털까지 꼼꼼하게 적셔준다.
7. 샴푸를 하고, 헹구고, 린스를 하고, 헹구고, 헹구고, 헹구고, 마지막으로 세수를 하고 몸을 2번 털게 한다.
8. 수건에 올려놓기 전 손으로 발과 꼬리의 물기를 쭉쭉 짜준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선 욕실은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다.
꼼은 이중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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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털은 이중모와 단일모로 구분할 수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중모는 겉털과 속털로 이루어져 있고, 단일모는 겉털만 존재한다.
이론적으로는 각각의 역할이 있어 짧은 속털로 추위를 예방하고, 길게 난 겉털로 햇빛을 차단한다는데
겨울철에 덜덜덜 떠는 꼼을 보면 추위를 예방한다는 건 잘 모르겠고, 지금까지도 속살이 뽀얀 핑크색인 걸 보면 햇빛을 차단해 주는 건 맞는 것 같다.
따라서 이중모를 가진 개들은 여름철에 털을 짧게 미는 것보다 빗질을 자주 해주는 것이 더위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촘촘히 난 속털은 날씨에 따라 털갈이를 하는데 속도에 맞춰 제때 빼줌으로써 서로 엉키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밝히는 나의 노하우!
이중모의 털관리는 비교적 어려운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만 신경 쓰면 겉털과 속털이 마구 엉켜 빗질로도 해결이 안 되는 처지에 빠지는 길은 피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씻기는 날 빗질을 최대한 꼼꼼하게 해 줄 것.
핵심은 <속털까지 보송하게 말려주는 것>이다.
일단은 수건으로 겉털을 말린 다음에 드라이기를 고정해 아래에서부터 차근히 한 올 한 올 장인의 정성으로 속털을 말리는 동시에 빗질해 준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 귀찮음에 중도 포기하지 않아야 털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제대로 말려주지 않아 속털과 겉털의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뒤죽박죽 엉키는 지름길에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딱 하루만 혼신의 힘으로 말리고 나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다음 목욕까지 털이 엉키는 일은 없다.
평소에 자주 엉키던 곳(꼼의 경우엔 엉덩이와 다리, 귀 뒤)을 신경 써서 빗질해 주고, 마지막으로 귓병에 걸리지 않도록 귓속까지 물기가 없게 말려주면 이제 마무리 단계만 남았다.
무릎에 꼼을 앉혀두고 원숭이가 털을 고르듯 빗질이 안 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면 정말로 끝.
장장 1시간 반 만에 내게서 탈출한 꼼은 침대로 올라가 장난감을 입에 물고 거실로 나와 한바탕 뛰논다.
흩날리는 털들을 치우고 나도 거실로 가 냅다 눕고 싶지만 아직 내겐 욕실 청소가 남았다.
아, 그리고 내 몸도.
막상 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적고 보니 누군가를 씻겨준다는 건 사랑을 보장하는 행위인 것 같다.
목욕 내내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고루 비누칠을 해야 하며, 비눗물이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헹궈야 한다.
감기에 걸리지 않게 재빨리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속까지 빈틈없이 말리고, 남은 뒷정리까지.
그런 의미에서 꼼, 나 좀 씻겨주라.
너 나 사랑하잖아.
막 드라이를 마친 개에게선 뽀송한 냄새가 난다.
옆에 누운 꼼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로운 샴푸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시간은 단 이틀.
삼일 째가 되면 미세한 샴푸 냄새 사이로 꼼의 고유한 냄새가 폴폴 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제일 널리 알려져 있는 건 발바닥 꼬순내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위는 볼이다.
볼에 뽀뽀를 하면서 코를 킁킁거리면 갓 나온 강냉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꼼은 볼> 목덜미> 옆구리> 발바닥 순서로 좋은 냄새가 나는데,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옅어지는 냄새는 신기하게도 발바닥에 도착해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꼬순내로 변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튀겨진 지 오래되어 눅눅한 뻥튀기 같달까.
(매일 산책하고 발을 닦아서 그런지 순도 백 퍼센트의 느낌은 아니다. 무언가 섞였다. 아, 발밤을 발라서 그런 건가?)
그리고는 갑자기 이마에선 생뚱맞게 참기름에 달달 볶은 미역국 냄새가 난다.
팔팔 끓고 있는 미역국 수증기에 머리를 갖다 대면 날 법 한.
꾸릿꾸릿한.
내가 꼼에게 “해주었다”라고 자신할 만큼 잘한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를 무서워하지 않게 만들어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교통수단을 잘 타도록 해 준 것이다.
처음에 꼼은 기계에서 나오는 각종 소리를 무서워했었다.
청소기 소리나 이발기 소리, 드라이기 소리, 믹서기 소리 등 기계음이 들리면 아이고 나 살려라 꽁무니 빠지게 달아났다.
집에 사람이 여럿 있으면 한 사람은 소리를 내고 다른 한 사람은 꼼을 안아주는 식으로 달래주다가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어이게 뭔지 이해를 시켜줘야겠단 생각으로 옆에 앉혀놓고 기계가 작동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로 했다.
위잉- 소리에 흠칫 놀라 달아나려던 꼼은 금방 사라진 소리에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냄새에 흥미를 잃을 때쯤 다시 위잉-하면 또 달아나려다가 말고 다가와 냄새를 맡고, 이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위이이이이잉- 소리에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이걸 모든 기계를 사용할 때마다 반복해서 적응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는 무섭지 않다는 걸 인식한 꼼이 청소기를 공격하기 시작했단 거다.
적응을 하랬지 싸우란 건 아니었는데 어디서 그런 오해가 생긴 건지, 청소기 헤드를 향해 무자비하게 덤비는 꼼에게 청소기는 싸움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시급히 알려주어야만 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 청소기를 공격하는 건지 유심히 살펴봐도 대중이 없어서 원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정공법을 쓰기로 했다.
<냄새를 충분히 맡게 해 주기>
(당시에 나는 개에게는 코가 전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라 냄새로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관심 없이 누워있다가도 알 수 없는 타이밍에 꼼이 공격을 개시하면 전원을 즉시 꺼 청소기를 눕힌 다음에 충분히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소리를 내지 않는 청소기에 관심이 사라진 꼼이 다시 자리에 가 누우면 전원 버튼을 누르고, 또 갑자기 다가와 공격을 하면 다시 청소기를 꺼 눕히고.
흥분한 꼼을 가로막는 것보다 원인(청소기 소리)을 제거하는 것이 진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한동안 그렇게 해주었더니 다시 기계 소리에 둔감한 꼼이 되었다.
이제는 꼼이 어디에 누워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위잉-소리를 내며 돌아다녀도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드라이를 하는 동안에도 쿨쿨 잘 잔다.
이에 연계되어 긍정적으로 작용된 것인지는 몰라도 꼼은 오토바이 소리, 공사장 소리, 기차 소리, 경적 등에도 상관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싸움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자기가 이긴다고 생각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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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꼼과 여행] 둘 중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필수로 꼼을 모든 대중교통에 적응을 시켜야만 했다.
누구 하나 시킨 이 없는데 홀로 과제를 부여받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꽁꽁 싸맸다.
당시 나의 신조만 보더라도 내가 얼마나 진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성급함으로 앞으로의 모든 나날을 망치지 말자! (아자!)
다짐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첫발을 뗐다.
인터넷을 뒤져 꼼이 제일 안정을 찾을 수 있어 보이는 카시트와 이동 가방을 준비해 적응하는 기간이 그 첫 단계였다.
블로그에서 하라는 대로 한동안 집안에 두어 스스로 안에 들어가 앉으면 간식을 주고, 칭찬을 해주면서 좋은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으로는 가방과 함께 산책 다니기.
가방을 메고 매일 돌던 동네를 벗어나면서 가방에 들어가면 새로운 산책길이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몇 번 했더니 가방을 꺼내기가 무섭게 알아서 들어가는 단계로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기분 좋게 가방에 올라탄 꼼과 언제든지 내릴 수 있는 지하철에 올라 10분, 20분, 30분씩 시간을 늘리며 더욱 멀리 산책을 다녔다.
그리고 1시간이 넘도록 누워있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곧장 KTX를 예매해 바다를 보러 떠났다.
그동안의 특훈이 효과가 있었는지,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꼼은 끙-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나의 여행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약 1년에 걸쳐 기차를 완벽하게 적응시켜 주니 버스나 비행기, 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1-2시간 정도는 거뜬하다.
그러나 만사가 순탄할 리 없지.
골이 지끈거리는 문제는 자동차에서 발생했다.
다른 교통수단들은 쉽게 적응하길래 자동차도 어렵지 않겠거니 했었는데 나의 오산이었다.
시동을 걸자마자 거친 진동이 시작되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나머지 내 목 위를 타고 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깨에 앉을 정도로 기겁을 하는 꼼의 모습에 자동차는 포기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일단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진정을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에 무릎에 앉혀놓고 몸을 반으로 접어 완전히 꼼을 덮어보았다.
시야를 차단하면 진정된다는 걸 어디서 본 후라 급한 대로 내 몸으로 암막 커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꼼의 숨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너 당분간 그러고 다녀라.
가족들의 명령으로 나는 그날부로 꼼만의 암막 커튼이 되었다.
멀쩡히 설치되어 있는 카시트는 뒤로하고 꼼과 샌드위치가 되어 뒷좌석에 실려 다니기를 몇 번,
허리가 아파 몸을 펴니 굳이 몸을 굽히지 않아도 꼼이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기세로 슬쩍 몸을 움직여 카시트에 앉게 했더니 그대로 앉아 도착할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로 꼼은 자동차에 올라타면 카시트로 알아서 올라가는 자동차 타기 만렙 고수가 되었다.
(조수석에 안고 올라타도, 뒷좌석에 설치되어 있는 자기 카시트에 가서 앉는다고 고집할 정도다.)
이제는 자동차를 타면 멀리 나간다는 것을 알아서 미리 배변을 마치는 철두철미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했으니.
핑계도 생겼겠다, 더욱 열심히 데리고 다닐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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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꼼이 자동차 적응을 마친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로 삼십 분쯤 넘게 달렸을까.
평소 같았으면 카시트에 엎드려 있어야 할 꼼이 내 무릎에 올라오겠다고 하길래 옛 추억이 떠오르나 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꼼을 품에 안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는 더욱 뜨뜻해졌다.
이건 뭐지?
쓰읍. 이렇게까지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는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지나쳐 꼼을 품에서 떼어내 봤더니 나의 앞섬이 꼼의 개운함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참나. 내가 얼마나 편하면 품에다가 볼일을 보는 거야.
어이가 없어 이 사태를 가족들에게 널리 알리고 급히 간선도로를 빠져나와 가장 먼저 보이는 옷가게 사장님께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때 산 옷이 아직 나의 옷장 안에 소중히 걸려있다.
꼼, 기억나?
덕분에 나 옷 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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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살면 옷이 더럽혀질 일도, 옷을 새로 살 일도 생긴다.
따로 애쓸 필요 없이 저절로 나만의 옷이 만들어지는 일도 흔하게 일어나곤 한다.
이름하야 꼼 에디션.
털 범벅이 된 모자와 구멍 난 티셔츠, 찢긴 바지.
막상 입고 나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단지 이것 하나만 해내면 된다.
마음을 내려놓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