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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개를 위한 최선이지 않을까

속상함: 화가 나거나 걱정이 되는 따위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

by 위드꼼



개의 나이를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적절한 보살핌을 해주기 위함이라는 건 알지만 그 단순한 수치가 개의 삶을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개에게 굳이 사람의 나이를 덧씌울 필요가 있을까.


멋대로 선을 그어 시기를 나누는 대신에, 오늘을 함께 보내고 있는 개를 조금이라도 더 들여다보면 개의 진짜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자라난 개의 변화를 곁에서 알아차리는 것만큼 정확한 계산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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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이 된 꼼은 전과 다를 것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논다.

달라진 게 있다면 잘 놀고 난 다음, 전보다 밥도 더 잘 먹고, 잠도 더 잘 잔다는 것?


아침에 나란히 눈을 떠 일상을 시작하고 같이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까지, 8년간 한치의 변함이 없다.

여전히 나보다 빠르고, 여전히 나보다 부지런하다.


그런 탓에 누군가가 꼼의 나이를 물으면 새삼 놀라곤 한다.

이 꾸러기가 벌써 8살이라니.


8살이면 개의 나이로 노령기에 접어들었다지만 장난감을 입에 물고 잠든 꼼을 보고서 공경의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쫓아다니기 바쁜데 노령기는 무슨.


그래도 나이는 나이인지라 딱히 무슨 일이 없어도 지레 겁먹고 꼼이 조금 무리했다 싶으면 휴식 시간을 늘려주고는 있지만, 아직 내 눈에는 어리기만 하다.


어리다 못해 아리다.


이렇게 해맑아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지?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칠 만큼.



이런 말



저리 가겠다는 꼼과 이리 가야 한다는 내가 옥신각신하는 평범한 저녁을 보내던 중이었다.

우선은 횡단보도를 건너가기로 합의를 보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서 계시던 분이 꼼의 나이를 물어왔다.


8살 됐어요.

8살이요? 늙었네.


이제와 고백하자면 방망이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세상에 늙었다니..!


집으로 돌아와 꼼의 발을 씻겨줄 때까지 머릿속에서 ‘늙었네‘라는 말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자라나는 중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지만.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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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랑 다니다 보면 다양한 소리를 듣게 된다.


가장 자주 듣는 건 꼼을 귀여워하는 소리.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인사를 나눌 정도로 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심지어는 내가 꼼 사진을 찍고 있으면 옆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동참하기도 한다.

(아마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의 사진첩에 나도 보지 못한 꼼의 사진이 담겨 있을 것이다. 너무 보고 싶다.)


여러 칭찬과 감사한 말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어떤 두 학생의 대화다.


공원의 기다란 벤치에 앉아 꼼에게 물을 주던 중이었다.

열정적으로 물을 마시고 있는 꼼을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쟤는 자기가 귀여운 걸 알까?

알겠지. 모르겠냐?


무미건조한 어조 속 그렇지 않은 내용에 방어할 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웃으니까 그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꼼도.


제가 보니까 아는 것 같아요.


입가에 물은 잔뜩 묻힌 채로 우리를 올려다보는 꼼이 귀여워 또 한참을 키득키득.

건너편 사람들도 그런 우리를 보며 키득키득.


개가 귀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웃음이 번지던 오후였다.


/


한때는 자주 들었지만 지금은 거의 듣지 못하는 말도 있다.

자신의 방법이 정답인 듯 내게 강요하던, 그 방법만 하더라도 셀 수조차 없는 관여의 소리.

개의 건강과 관련한 조언이라면 고개 숙여 감사히 듣겠지만, 그게 아닌 주먹구구식 가르침들은 솔직히 피해 다니고 싶다.


예전에는 꼼에게 향하는 모든 말들이 꼼을 위한 진심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쉽게 만들어진 말들이라는 걸 모르고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던 때도 있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 아닐지.

내가 알던 것들이 전부 이론에 불과한 것이면 어떡하지.


나라는 보호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꼼을 다른 개들과 인사시켜야 하는 걸까.

그래야 꼼이 더 행복할까.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싫다는 꼼을 끌고 내 멋대로 굴고 싶지 않아 나는 결국 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내게 중요한 건 꼼이니까.

꼼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꼼을 위한 최선이지 않을까 애써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진심의 말도, 때로는 우리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말이 있는 반면에 당연하게 튕겨져 나가는 말도 있는 법이다.

내 안에 머물지 못하는 말까지 힘겹게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


정답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과, 우리가 함께 나눈 시선에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면서 반려생활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한 것도 한몫을 해주었다.


인사하라고 떠미는 것보다 거리를 유지하며 안전히 지나가는 것이 더욱 건강한 산책법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산책길의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그렇다고 경계를 늦출 정도는 아니고.)



저런 말



아직도 세상에는 반려동물을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움직이는 인형쯤으로 여기고 데려왔다가 뜻대로 안 되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뻔뻔하게 숨을 쉬고 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은 어떤 머리를 거쳐야 나올 수 있는 건지.


되도록이면 영원히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개와 산책을 하다 보면 자신의 개를 버린 사람을 돌연 만나기도 한다.

그것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밝은 미소로 나의 개와 인사를 나누는 사람을.


처음에는 꼼을 너무 예뻐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기에 개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미용은 어떻게 하는지 등 꼼의 생활환경부터 성격까지 쉴 새 없이 묻기도 했다.

그래서 당연히 집에 개가 있는가 보다 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 이제 같이 안 살아요. 개가 너무 말썽을 피워서 다른 곳에 보냈어요.


나름 리액션 하나만큼은 자부하고 있었는데, 사정없이 날아드는 말에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어땠는지 가당치도 않은 이런저런 변명들로 계속해서 나를 찌르고 할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도망을 쳤던가.

아니면 그 사람이 도망을 갔던가.


끝없이 이어지던 변명의 굴레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은 마음에 남아있다.


그게 버린 거잖아요.


왜 개를 버린 사람들은 다른 곳에 보냈다고 말을 하는 걸까.

그럼 좀 낫나.


/


꼼과 인사를 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1. 인사해도 돼요?

2. 물어요?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꼼은 문다.

나만.


개랑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개가 싫어하는 일들(발톱 관리, 엉킨 털 관리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간혹 물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인사 정도로 꼼이 다른 사람을 물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인사해도 돼요?”란 질문에도, “물어요?”란 질문에도 똑같이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대답을 해보자면,

물기는 무는데 단순히 인사를 한다고 해서 물지는 않아요. 그런데 개가 무는 게 걱정이 되면 인사를 안 하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개가 그렇지 않을까.

단체로 티셔츠를 맞춰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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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요? 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해보겠는데, 들을 때마다 경악스러운 건 사납죠? 란 질문이다.

매체를 통해 알려진 단편적인 정보만을 듣고 개의 외형, 즉 종만 보고 지레짐작 판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내 안의 사나운 감정들이 마구 올라오곤 한다.

사납고 말고를 떠나서 초면에 대뜸 물을 질문은 아니지 않나?


개와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회에 퍼져있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만연한지 알 수 있다.

정작 개에 대해서는 잘 모르면서 어떤 종은 이렇고, 또 어떤 종은 저렇다는 말을 그게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기곤 한다.


특정한 종을 ‘사납다’거나 ‘키우기 어렵다’고 단정하는 건 과장된 이미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유전의 영향으로 다른 종보다 그런 특성을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개의 성격과 행동은 환경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건 아니듯이.

개 역시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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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이 8살이라고 하면 다들 믿지 못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8살이 된 개의 모습은 대체 어떤 걸까.


그러다 문득 8살이 된 개를 자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도 그랬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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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린 강아지를 선호한다.

그런 이유로 어린 강아지의 유기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상만 꿈꾸고 덥석 입양을 했다가 금세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면 나 몰라라 개를 두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기 비율이 높은 연령대는 6-10세.

이유는 씁쓸하다.


건강했던 개가 조금씩 아픈 곳들이 생겨서.


사람들의 기준에 ‘늙음’‘병원비가 많이 나옴’과 동일하다.

그렇기에 6-10세의 개들은 한창 뛰어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늙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버려지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산책길에서 만나는 다른 개들의 나이는 보통 2-4세가 주를 이룬다.

아니면 10살이 넘었거나.


그리고는 정말 만나지 못했다.

꼼이 8살이 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는데 동갑 친구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고작 8살밖에 안 되었는데 또래를 만나는 게 어려운 현실이라니.

참 오싹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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