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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나누는 사랑은 모든 시름을 번쩍 들어버린다

사랑스러움: 생김새나 행동이 사랑을 느낄 만큼 귀여운 데가 있다.

by 위드꼼



꼼은 볼일을 보기 전 나를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한다.

빙글빙글 돌다가 말고 멈춰 서서, “여기에 해도 괜찮을까?”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저 나쁜 사람이 개를 아주 호되게 잡았구나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평소에 얼마나 혼을 냈길래 저렇게 아련한 눈망울로 애원을 할까.


뒤따르는 나의 말까지 연달아 듣는다면 아마 참지 못하고 경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어보는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응,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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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짐작해 보건대, 아마도 꼼과 나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옛적 배변판 위를 돌다 말고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꼼은 무슨 일이지 하고 잠깐 쳐다보았을 뿐인데,

그대로 안 하고 내려올까 봐 걱정이 되었던 내가 “해.”라고 말을 하자 그걸 꼭 거쳐야 하는 신호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그 후로 꼼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구별하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며 “해.”를 기다린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꼼에게 마저 놀겠다고 뛰어 내려오지 말고 얼른 먼저 하라고 말해주었던 것이었는데.


단 한 번의 조급한 말로 인해 우리에겐 되돌릴 수 없는 규칙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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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꼼이 매번 그러는 건 아니다.

급할 땐 뒤도 안 돌아보고 슬라이딩하듯 달려가 착- 착지를 한다.


빙글빙글 도는 것도 잊고, 이제 살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잠든 순간까지도



멍 때리듯 가만히 앉아 꼼을 찬찬히 살펴보는 날이 있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뒤를 돌았는데 꼼이 잠들어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인기척에 눈을 뜬 꼼은 정체가 나라는 걸 알고는 쓰다듬기 좋도록 앞발을 들어주고,

그럼 나는 그에 응답해 배와 등을 어루만지며 꼼이 다시 잠에 드는 순간을 지켜본다.


쏟아지는 잠을 떨쳐내지 못하는 개에게는 무방비한 사랑스러움이 잔뜩 묻어있다.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쫑긋거리는 귀와 무거운 눈꺼풀과 맞서는 눈, 쓰다듬기를 멈추면 움찔하는 몸까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던 코와 발은 이 순간에서만큼은 조용하다.

오독오독 소리를 내던 입 역시도.


꿈나라와 현실 세계를 힘겹게 오가던 꼼은 몸을 일으켜 눌린 털을 한 번 털어내더니 원래의 동그랗게 만 자세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부터는 건들지 말고, 오직 눈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내 손길을 피해 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 테니.

아쉬운 마음을 누르고 눈길로 꼼을 쫓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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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로 얕은 잠을 잔다고 한다.

경계심이 높아서 긴장의 끈을 가능한 한 끝까지 붙잡으려는 것이다.


꼼은 그중에서도 예민한 편에 속한다.

내게 개는 꼼이 처음이지만, 초보자의 눈으로 봐도 꼼은 아주 예민한 잠귀를 가지고 있다.


벌러덩 누워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처럼 자고 있다가도 내가 몸을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고개를 들어 모든 나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내가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 불편한 자세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다.


그런 탓에 집에 손님이 오면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밖에 나가면 그게 몇 시간이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자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도 자는 것만큼은 쉬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처럼 예민함이라고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꼼도 무장이 풀린 모습으로 꿈나라를 헤맬 때가 있다.

그러려면 우선 끝내주는 산책을 해야 한다.


경계심은 뒤로 하고 지쳐 쓰러져 잘 수 있을 만큼 환상적인.


그런 순간에 꼼은 오락실에서 날 법한 소리를 낸다.

뿅-


뿅-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잠시 멈추었던 코와 발도 바삐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

아마 꿈에서도 끝내주는 산책을 하고 있나 보다.






밤잠을 자고 일어난 꼼은 안 그러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난 꼼만 하는 행동도 있다.

벌러덩 누운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웡!


힘껏 뻗은 손 하나와 함께, 접힌 뒷다리도 뿅하고 튀어나온다.

어설프게 태권도를 따라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얍! 대신에 웡!


이제 일어났으니 와서 아는 척하라는 소리다.


웡! (왜 안 와!)

웡! (나 일어났다니깐!)



나에게 너는 완벽해



꼼은 내게 맞춤 개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을 수가 있지 하고 감탄할 만큼.


성격도 성격이지만 몸도 나랑 찰떡이다.

자로 잰 듯 꼭 맞는다.


운명인가?


예컨대, 꼼이 바로 누우면 등길이가 내 어깨보다 약간 작아서 팔꿈치를 세우고 엎드렸을 때 양팔로 감싸 꼼을 쓰다듬기에 안성맞춤이다.


꼼을 안아 들면 꼼의 고개가 마침 내 어깨에 기대기 좋은 위치에 있기도 하다.

그 덕에 졸린 꼼이 고개를 파묻으면 폭 껴안은 모양새가 되는데, 그게 나는 퍽 좋다.


책상다리를 하면 꼼이 누울 침대가 되고, 무릎을 세워 마주 보게 앉히면 기가 막히게 나의 무릎이 꼼의 뒷목을 받쳐준다.


추운 겨울에 패딩 안으로 꼼을 감싸면 머리만 쏙 내밀게 할 수 있고,

천둥소리에 놀란 꼼을 달래려 몸을 숙이면 내 품 안으로 쏙 숨길 수도 있다.


제일 끝내주는 건 꼼이 내 팔오금에 맞춰 엉덩이를 붙여 앉으면 제일 좋아하는 부위(목덜미 부근)를 쓰다듬어줄 수 있단 것이다.

그렇게 나란히 누워 꼼을 쓰다듬고 있다 보면 짜릿한 쾌감이 밀려온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테트리스 조각을 만난 것만 같은.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


[평생소원이 누룽지]라는 속담이 있다.

기껏 바라는 것이 너무나 하찮은 것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소원인데 내 마음이지 않나.


나의 평생소원은 개였다.

정확하게는 개와 살기.


더 정확하게는 개와 늙어가기.


따라서 나의 소원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말 그대로 평생일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 개와 특별한 추억을 나누지도, 하다못해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한 적 없었는데도 그랬다.


한 가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주 어렸을 때조차 저마다의 개가 저마다의 개로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개를 뭉뚱그려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길에서 마주친 모든 개가 저마다 사랑스러웠다.


그런 내게 꼼이 찾아왔으니, 나의 기쁨이 얼마나 커다란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꼼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로 왔으니.


나의 곁에 누워 잠을 자고, 나의 발걸음에 맞춰 길을 걷는다.

그런 것도 모자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꼼을 보고 있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마음이 일렁인다.


내가 미처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사랑이 꼼의 눈을 타고 내게로 넘어오는 순간에는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내가 줘야 하는데 내가 받고 있어서.


나의 평생소원을 이길 수가 없어서.


//


누군가는 나의 소원을 두고 고작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평생소원이 개와 늙어가기라니.


하지만 누군가는 나의 소원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 알 것이다.

개와 평생 늙어가려면 조금 열심히 살아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개의 평생을 책임지는 일을 고작이라는 말로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그건 개와 안 살아봐서 하는 말이다.


/


내가 아닌 한 생명을 책임지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꼼에게서 배웠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행복한 것과 별개로 해가 갈수록 쌓이는 마음의 무게가 존재했다.

무엇으로도 해소될 수 없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소원을 놓지 않는 이유는 개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다 상관없어지기 때문이다.

개와 나누는 사랑은 모든 시름을 번쩍 들어버린다.


사랑은 그런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꼼을 안아 들 힘만큼은 기어코 만들어내고야 마는.


똑같은 무게의 다른 걸 들으라고 하면 어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참고로 나는 우산 드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다.

가방 드는 것도 번거로워서 뒷주머니에 휴대전화만 달랑 들고 다니는 나인데.


도대체 사랑이 뭔지.

아무 때고 물어봐도 나의 대답은 “응, 사랑해.”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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