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다시 시작을

가을이 내게 준 것

by 위드꼼


개와 산책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꼼에게 이끌려 원래 내가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가게 되었는데 여름내 황량했던 공터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 심겨 있었다. 누가 내게 이름을 묻는다면 그저 “꽃”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낯설지만 어여쁜 모습을 한 꽃들이 활짝 피어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가을은 말이 살찌는 계절, 독서의 계절, 결실의 계절. 그리고 내가 아프게 될 계절. 나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즈음 꼭 아프곤 한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르지도 않고 꼬박꼬박.

꽃밭에는 엄지손톱만 해 보이는 아주 작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건 처음이어서 휴대전화를 꺼내 열을 다해 찾아보니 <작은주홍부전나비>인 것으로 보였다. 벌새와 닮은 박각시나방을 우연히 발견했던 게 2020년 가을이었으니까, 꼬박 5년 만의 발견이었다. 까먹을세라 메모장에 이름을 적어두는데 발치에서 기다리던 꼼이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나비의 이름을 알아내는 동안 하늘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꼼아, 이제 가을이야. 별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작은 나비의 섬세한 날갯짓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뱉은 게 잘못이었을까. 입방아를 찧어도 한참을 잘못 찧었는지 그로부터 이틀 후, 나는 앓아눕고야 말았다. 누워있는 동안 드는 생각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이거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다. 평소라면 기운이 없는 정도로 하루이틀 푹 쉬고 훌훌 털어내 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저녁부터 열이 끓기 시작하더니 닷새간 기운은커녕 꼼의 물을 뜨러 가는 그 짧은 거리조차 버겁기만 했다. 밤새 속을 비워내고 낮에는 그 여파로 끙끙 앓기를 며칠. 그런 내 머리맡에는 언제나 나의 꼼이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배에 올라탄 것 같아서 거실에 베개를 놓고 누웠더니 안방에서 자고 있던 꼼이 쪼르르 내려와 내 몸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전날 아무것도 모르고 목욕을 시킨 터라 순간 꼼의 샴푸 향이 훅 풍겨왔는데, 이제와 몰래 고백하자면 메슥거리는 속에 꼼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꼼은 영문도 모르고 거절을 당할 터. 숨을 꾹 참고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니 아무것도 모르는 꼼이 슬금슬금 올라와 베개 끝에 엉덩이를 깊숙이 들이밀었다. 짙어지는 향기가 괴로워 고개를 슬쩍 돌리면 그만큼 자리가 났다며 다시 꼭 붙는 모습에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내가 졌다.




지금 이 글은 한 달에 걸쳐 작성되고 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된통 아프고 나니 회복도 더디고 책상 앞에 앉는 게 게을러져서 오늘은 써야지, 이번 주엔 올려야지 하는 다짐을 미루고 미루다 하마터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이쯤 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조차 아득해서 길을 잃은 막막함으로 뒷목만 긁적이고 있는데, “평소”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서 잠든 꼼을 보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내가 저 녀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계속해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 방으로 자러 들어갈 만큼 침대의 푹신함을 좋아함에도 단번에 거실로 나와 내 곁을 지켜주어서, 겨우 쪼그려 누운 나의 등에 너의 등을 맞대어 주어서 참 고마웠다고. 내가 지금의 평소를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전부 꼼 덕분이었다.


세면대를 붙잡고 겨우 정신을 차려서 나오면 제일 먼저 꼼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쯤은 무시할 법도 한데, 꼼은 매번 내가 빠져나간 자리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간 불빛에 작아진 눈을 하고도 나를 맞이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단 1mm도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잠에 취해 간신히 눈만 들어 올린 꼼은 내가 곁으로 가 눕자마자 이제 되었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혀 내게 몸을 기대 왔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일어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방에 들어가 편히 자라는 나의 말에도 꼼은 그저 나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 뿐이었다. 절실했던 핫팩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꼼의 온기에 잠이 솔솔 밀려와 잠들락 말락 하는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코앞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슬쩍 눈을 떠보니 이게 웬걸 좀 전만 해도 부스스한 얼굴로 이불에 파묻혀있던 꼼이 (실제로 어디가 얼굴이고 어디가 엉덩이인지 구별이 안 가 한참을 살펴보기도 했었다.) 말똥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단호한 손짓도 거드는 것으로 보아 기어코 아침이라는 녀석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더 정확히는 꼼의 아침밥 시간이 한숨도 자지 못한 내 위로 쿵 떨어져 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내 위로 폴짝하고 뛰어올랐다. 내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지, 아픈 건 아픈 거고 밥은 밥인 거려나.


내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개의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벌새의 날갯짓처럼 보이지도 않는 개의 발이 나를 넘나들며 바쁜 하루를 소화해 냈다. 아침을 먹고 다시 내 곁으로 와 자고 다시 일어나 화장실을 가고 물을 마시고 또 밥을 먹고 장난감을 물어 오고 또 물을 마시고 다시 자고 일어나 앉아 현관을 바라보고. 거실에 쓰러져있었던 탓에 혼자 바쁜 꼼이 나를 사뿐히 지르밟고 다니곤 했는데, 악-소리도 내지 않고 누워있으니까 정말 카펫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싶을 만큼 거침이 없었다. 밤새 나를 지키던 녀석이랑 같은 녀석이 맞는 걸까 의심이 들 때쯤 밤이 찾아왔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날 때쯤이면 날이 밝았다. 놀랍게도 그 녀석이 그 녀석이었다.

개랑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병을 얻는다. 맑은 하늘을 그냥 못 지나치게 되는 병.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고 묻는다면, 하필 거실에 누워있는 바람에 발끝 너머로 펼쳐진 가을 하늘이 아주 눈부시게 괴로웠단 소리다. 밖에 나가지 못한 게 벌써 이틀. 그리고 개에게는 평생 풀지 못할 궁금증이 하나 있다. 왜 오늘은 안 나가는 거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서 창문 한 번 나를 한 번 쳐다보는 꼼에게 내가 아프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산책은 산책일 테니까. 삼세번을 채울 수야 없지. 하늘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중이었고, 노을빛에 황금색이 된 꼼의 뒤통수를 보면서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꼼아, 정말 가을이야. 누워있기엔 너무 아까운 가을이었다.





나를 일으켜준 황금빛





매거진의 이전글풀씨와의 전쟁: 산책길 수난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