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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Jan 11. 2022

수제비 한 그릇

음식 이야기(1)

예닐곱 살쯤 되었던 것 같다. 언니와 오빠 손에 이끌려 나는 목적지도 모른 채 쫄랑쫄랑 신이 나서 발걸음을 옮겼었다. 나는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다. 긴 길이었는데도 언니와 오빠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행위(과정) 자체가 좋아서 목적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떤 집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여정이 멈췄다는 것을 알았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활짝 웃고 있는 이모가 서 계신 것을 보고 우리의 목적지가 이모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조그마한 발을 칠이 벗겨져 부분 부분 녹슬어 있던 낯선 대문을 밀며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언니,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언니와 오빠는 내가 대문 안에 들어선 것을 확인하자마자 임무를 마친 요원이나 되는 듯이 나를 황량한 마당에 세워둔 채 휙 떠나버렸다. 어린 나에게 언니와 오빠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였다. 눈앞에서 웅얼웅얼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순간 언니와 오빠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것을 확인한 뒤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눈앞에서 마술쇼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모는 처음 자신의 집에 놀러 온 꼬마 손님이 놀라지 않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을 내게 남기고 마당 한 편의 쪽문을 열고 부엌이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이모에게는 정해진 수순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짙은 나무 색깔 나무판자가 깔린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이 급작스러운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눈앞으로 자그마한 마당이 보였다. 시멘트로 된 마당 바닥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고 내벽 끝쪽으로 잡풀과 이끼가 보였다. 햇빛은 마당 한가운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번 휘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집안 전체가 어린아이의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집이었다. 나는 낯선 풍경들을 세세하게 둘러보며 붙박이처럼 이모를 기다렸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충실했다. 그 당시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이윽고 이모는 가운데 보라색 꽃그림이 그려진 동그란 스테인리스 상을 번쩍 들고 나타나셨다. 상을 들고 있는 이모의 모습은 어찌나 자신만만해 보이던지. 상을 든 이모의 팔뚝은 얼마나 힘이 넘쳐 보이던지. 마루에 안착한 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그릇의 수제비가 놓여 있었다.


이모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엄마도 음식 솜씨가 좋았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었던 이모 솜씨도 집안 내력인 듯 훌륭했다. 시집을 안 간 이모에게서는 엄마에게서는 맡을 수 없었던 독특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얼굴에 찍어 바른 여러 가지 화장품들의 조화로 탄생한 향기였을 것이다. 스킨과 로션 외에는 그 이상 화장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독특한 향기가 이모에게서는 언제나 풍겼고 나는 그 냄새만 맡아도 이모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냄새를 '이모 냄새'라 명명했고 오랫동안 그 냄새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이모가 나 입으라고 얻어 다 준 옷에서도 이모 향기가 났는데 여러 번 세탁해도 지워지지 않던 이모 냄새를 신기해하며 가끔씩 옷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곤 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지금도 어렴풋이 그때의 냄새가 후각의 기억으로 찾아올 때면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곤 한다. 냄새로 따지자면 나는 엄마보다 이모를 더 애정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식당에서 주로 사용하곤 하는 넓고 깊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아이가 먹기에는 역부족일 거 같은 양의 수제비를 푸짐하게 담아왔다. 방금 떠온 수제비에서는 뜨끈한 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고 뜨거운 김과 함께 올라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그리고 두껍지 않고 얇게 빗어낸 수제비 조각들과 연둣빛, 노란빛을 드러내며 적당한 크기로 썰어진 호박들 위에 뿌려진 김가루와 깨소금이 어우러진 모습은 오감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작품 같아 보였다. 여섯 살 아이의 눈에 비친 수제비 한 그릇은 분명 작품으로 보였다. 나는 분명 우와, 하는 감탄을 속으로 던졌던 것을 기억한다. 엄마는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외형의 음식임에는 분명했다. 바쁜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지만 이렇게 예쁘게 한 그릇을 담아줄 여유까지는 없었다. 다섯 식구들을 먹여야 했으니 음식을 하면 재빨리 다섯 그릇으로 배분하기에 바빴다.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았지만 눈으로 음식을 맛 본건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벽한 작품이 불러온 파장은 아이를 낳아본 엄마에게는 있었으나 이모에게는 없었던 한 가지 때문이었다.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비가 마치 신기한 마법 스프라도 되는 양 내가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어느 순간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자성이 생긴 손바닥에 숟가락이 척하니 달라붙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작품의 한 부분(국물)을 후후 불어 입안에 떠 넣었다. 그것은 하나의 의식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먹는 행위를 대여섯 살 꼬맹이는 결코 잊지 않았다. 그 경건한 의식의 끝은 기분 좋게 국물이 혓바닥을 적시며 입안에 퍼져있는 미세한 미각세포를 하나하나 자극한 뒤 목구멍으로 넘어간 뒤 입안에 남는 뒷맛을 느끼며 뇌세포에서 만족스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건한 의식은 끝에 다다르지 못한 채 깨어지고 말았다. 국물을 입안에 넣는 순간 일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올라오는 구역질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입을 막고 억지로 올라오는 구역질을 밀어 넣었다. 어느덧 눈가에는 고통을 참느라 생긴 눈물 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마 눈의 흰자위가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조금 진정이 되자 나는 또 용기를 내어 한 조각을 후후 불어 입안에 넣었다. 또 밀려오는 구역질. 어렴풋이 무언가가 떠올랐다. 전에도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을 때 이런 비슷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젖은 김. 김밥 끝이 좀 젖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잠시 아름다운 작품에 취해 향기로운 이모에 취해 나는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모는 자신의 수제비 그릇에서 수제비를 떠먹으며 나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나는 고개를 처박고 그 일련의 행위들을 참아내고 있었다. 애써 몇 번을 참아가며 몇 번의 숟가락질을 하던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수제비 그릇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울음이란 존재는 이상하여 시작은 어려운데 일단 시작되고 나면 멈추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런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황한 이모는 어찌할 바를 몰라 "왜 그래?", "뜨거웠어?", "어디 데었니?", 등등의 온갖 물음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지만 나는 어떤 물음에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의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구역질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도 남을 나이였다. 그러니 이모는 30분가량 이어지는 나의 울음에 진이 다 빠져버렸고 간신히 울음이 멈추고 훌쩍이는 나의 손을 잡고 서둘러 언니 집에 데려다주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밖에서는 엄마와 이모가 대화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조금 놀란 듯한 이모 목소리와 차분한 엄마의 목소리. 나는 그런 대화들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이란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에, 밖의 목소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방이 주는 안락함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그저 향기 나는 이모를 실망시킨 것 같아 아주 조금 미안한 감정을 마음에 품었을 뿐이었다. 그때의 아주 작은 미안함은 내가 성장하면서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으로 자라났고 언니가 결혼을 하고 나도 조카가 생기는, 이모와 같은 상태에 이르러서야 큰 공감으로 변화했다. 이모는 조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이모가 우는 아이 앞에서 얼마나 진땀을 흘렸을까. 이모는 조카가 마냥 이뻐서 엄마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을 것이다. 특별히 초대를 계획했을 것이다. 특별히 가장 귀여울 수밖에 없는 막둥이를 선택했을 것이다. 특별히 수제비를 만들었을 것이다. 반죽을 치대고 숙성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사온 싱싱한 호박을 예쁘고 반듯하게 썰었을 것이다. 국물에 감칠맛을 더해줄 김을 석유곤로 위에서 여러 번 바싹 구워 조금의 힘만으로도 바사삭 부서지게 준비해 놨을 것이다. 그 모든 특별한 과정을 오롯이 어린 조카를 위해서.


- 언니, 막둥이 하루만 빌려줘. 내가 맛있는 거 해 먹이고 재밌게 놀아줄 거야.

- 그래. 나야 좋지. 네가 힘들 텐데. 고마워.

  참! 그런데, 막둥이한테 젖은 김을 먹여선 안돼. 비위가 약하거든.


내가 엄마였다면 그 주의사항을 잊지 않고 전달할 수 있었을까? 그 주의사항을 전달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모의 특별했던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다면 엄마는 꼭 잊지 않고 그 사실을 전달했으리라. 미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그 일은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그 정도 주의사항은 전달해야 엄마의 역할을 다 한 거 아니냐고? 나도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다. 엄마가 되면 자질구레한 일부터 큰 일까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걸. 나 하나만 챙기고 살면 되었던 시절이 금세 그리워진다는 걸. 그러니 누군가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 못한 걸 탓한다면 그 대신 AI 로봇 하나를 선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고 싶다.


왜 사람은 같은 위치에 서 보지 않고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인지 모르겠다. 그 어떤 간접 경험도 직접 경험의 단 1%도 근접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막연하게 생각만으로 공감하는 것과 직접 경험하고 나서 깨닫는 감정은 얼마나 천지 차이던가. 그 감정은 때때로 내게 겸손하라는 말소리처럼 들린다. 

나는 첫 조카가 태어나고 첫 조카가 마냥 이뻐 보여 선물 공세를 하고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놀아주고 나서야 그때의 이모의 감정이 어땠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가 되어서야 주의사항을 전달하지 않은 엄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렇다고 그 당시에 엄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수제비 한 그릇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 그림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올라온다. 그 그림은 이모가 내 앞에 상을 놓았을 때 첫 대면한 바로 그 모습 그대로다. 이모 집에 도착한 지 1시간도 안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 그날의 일 이전의 평화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있다. 자그마하던 미안한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나는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었던 어린 꼬맹이에 불과했으니까. 그림 속 수제비 한 그릇에서는 이모의 향기와 사랑과 정성과 마음이 하얗게 연기가 되어 피어오른다. 나는 그 속에서 그리움 한 스푼을 발견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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