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없다는 현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어려움(5)

by 하민

병원에 조직 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 검색의 무서움에 덜 데인 나는 - 확실히 그런 것 같다 - 전날 조직 검사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고 덕분에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유영하고 다녀도 막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굵은 바늘이라고 했는데. 분명, 아플 텐데... 잠깐, 따갑고 마는 정도면 좋겠는데...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는데, 선생님은 계속 초음파만 보시고 조직검사를 진행하지 않으신다. 염증이 뿌옇게 남아 있어서 구분이 안 되니 조직검사를 할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니, 다음에 하자고 하신다. 아니, 다음이라니요? 안 하셔도 됩니다, 가 아니고요? 며칠 전부터 각오를 다지며 왔는데, 막상 하지 않게 되자 당장의 두려움이 비껴간 것에 마음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환호성도 잠시. 걱정으로 채워질 미래가 더 두려워진 이성은 뭐라도 말을 뱉어야 한다고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마스크 속에 벌어진 입은 작은 공간의 공기만 뻐금거리며 두세 번 삼켰을 뿐이었다.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기대는 오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다시 나는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방문한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나를 빗속에서 꺼내 주실 때까지. 선생님은 초음파 영상을 확인하시더니, 분명한 어조로 암이 아니라고 하셨다. 한 방울의 망설임도 내포되지 않은 말이었다.

'잘 못 들은 건 아닐까?'

"갑상선염이 생겼는데, 염증이 갑상선의 기능을 망가뜨려 놓아서 당분간 항진증과 저하증이 나타날 수 있어요. 항진증이 생기다가 마지막에는 저하증이 오면서 서서히 정상으로 회복될 거예요."

"약을 먹으면 되나요?"

"약을 먹을 수도 있지만 안 먹는 것이 좋아요. 약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이 올 수 있거든요. 항진과 저하가 교차로 오기 때문에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어요. 아마, 증상이 3개월 정도 계속되다가 사라질 거예요."

나는 이런 부연의 말들보다 암이 아니라는 사실에 신이 팔려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정말 암이 아니지요? 머릿속에서는 이 문장을, 크고 정확한 발음으로 분명히 조금 전 공기 중으로 흘러나왔던 그 문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 밖에는 없었다.


집에 와서 갑상선 항진증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증상들이 모두 항진증 증상임을 알았다. 눈도 살짝 돌출된 것 같았는데 기분만이 아닌 사실 것이 슬프기도 했다. 선생님도 돌출된 게 맞다고 하셨다. 좋아질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좋아질 수 있을까? 외모에 관련된 부분은 특히 신경이 쓰였다. 그동안 나를 불안하게 했던 가슴 두근거림도 항진증의 영향이었다. 왜 가슴이 뛰는지도 몰랐다가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니 그저 하나의 증상으로 다가왔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제는 그냥 아픈 상태를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증상들을 내 생각 때문인 것으로 몰아붙일 때가 많았다. 때문에 애써 힘을 냈고 애써 움직였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런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생각 때문이 아니라 호르몬 이상으로 아픈 것뿐이었다.

정확히 알지 못했을 때와 알게 되었을 때의 차이는 극명하게 다가왔다. 정확한 병명이 나오자, 나는 애써 그 병을 이겨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병인지 모를 때는 짐작만으로 판단했기에 내게 생기는 모든 이상 현상을 근거 없는 분석으로 짜 맞추었다. 그 결과, 나는 맞지도 않는 헛짓거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좀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일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지나 봐야 명확해지는 것들.


약이 없다. 내 병에는 약이 없었다. 그 사실은 그날 병원에서 들었던 기쁨의 말 때문에 후순위로 밀려났던 현실이었다. 현실이 고개를 내밀고 내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큰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없이 견뎌야 할 증상들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말 눈앞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하얗고 얇은 커튼을 쳐 놓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고 불분명하게 보였다. 눈을 떴다 감아도 커튼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도 커튼은 벗겨지지 않았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뿌연 시선. 시력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예감처럼 우울이 찾아왔다. 고열이 나는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증상들이 있었고 나만 느끼는 갑갑함이 있었다. 식구들과 밥을 먹다가 밥을 끝내 먹지 못하고 침대와 한 몸이 되는 날이 많았다. 밥을 먹으면 두근거림이 더 심해지면서 피곤이 몇 배로 몰려왔다. 먹는 것이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왔고 먹지 않아서 기운이 더 없는 것인지, 그저 증상 때문에 기운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짧은 거리를 길게 천천히 걸어 다녔고 모든 것이 내 시선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말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숨 가쁘게 느껴졌다. 제발, 천천히 얘기하라고. 내 머리가 지금 천천히 흐르고 있다고. 평소에도 느린 나는 더 느린 시선의 내가 되었고 그들은 나의 밖에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생각이 분절되고 있었다. 늘 하던 익숙한 것들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다. 마치, 치매 초기 증상을 겪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마도, 치매가 찾아오면 이렇게 멍한 표정을 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머릿속에서 자꾸 무언가를 놓치고 허둥지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저하증이 오면 그런 증상들도 찾아온다는 것 같았다. 나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느낌들을 설명해야 할까? 혼자만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느낌. 아마도, 이 시기에 나는 저하증을 통과하고 있었던 듯싶다. 책이 읽어지지 않았고, 드라마가 재미있지 않았고, 예능 프로그램도 시큰둥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슬픈 장면만 봐도 눈물이 흘렀다. 자주 울었다. 얘기할 수 없는 답답함에 울었고 내가 어디론가 떠밀려 갈까 봐 울었다. 아무래도 우울이 찾아온 것 같다고, 이런 생각들을 건지며, 인식할 수 있으니 진짜 우울은 아닌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건넸다.

병명이 내려졌으니 이제는 훌훌 털고 장밋빛 미래로 걸어가기면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중대한 착각이었다. 나의 장점은 끈기뿐이라고, 가진 것은 끈기 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내가 무색해질 만큼 나는 견디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며칠 크게 아프고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남은 3개월을 이렇게 보내야 한다면, 과연 자신이 없어졌다. 정말... 3개월 후면 괜찮아지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건강할 때는 텔레비전만 봐도 즐거운데... 친구들과 수다만 떨어도 행복한데... 나는 웃을 힘이 없어서 웃지 못했다. 웃는데도 에너지가 그렇게 많이 드는 줄 처음 알았다. 리액션할 힘이 없어서... 힘을 짜내듯 웃었다. 기운 없는 나를 보고 기운이 없어질까 봐... 나는 없는 기운을 짜내어 웃었다. 웃기 위해서 웃었다. 슬프지 않기 위해 웃었다. 우울하지 않기 위해 웃었다. 우울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가까운 영역의 일이었다. 뒷산에 올랐다가...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왜 그랬을까?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서 온 몸에 상처만 안게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무서워지고 있었다. 정말 뛰어내리게 될까 봐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우울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자만하기도 했다. 내가 무얼 알 수 있었겠는가? 우울의 발톱 근처를 배회했을 뿐이었는데.....


몸이 허공에 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은 분명 땅을 딛고 있는데... 허방을 딛고 있는 느낌... 내 몸은 자꾸 공중으로 떠오르려 하고 아무도 나를 잡아주지 못했다. 세상이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제발, 누가 커튼을 걷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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