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무서워해야 하는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The fear of death is more to be dreaded than death itself.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BC85~BC43)
기원전 1세기 사람이었던 푸블릴리우스 시루스는 로마에서 작가로 활동했는데, 처음에는 시리아 출신의 노예로 팔려왔다. 혜안을 가진 주인은 그의 재치와 풍자를 겸비한 말솜씨를 높이 평가하여 노예에서 해방해주고 교육을 시켜 결국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게 도와줬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죽음에 대한 명언을 다루어본다.
최근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자.
갑자기 등장한 커다란 벌레?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영화? 앞에 나서서 발표해야 하는 부담감? 어두운 밤 몰아치는 태풍과 천둥·번개? 만약 나를 무섭게 한 것이 떠올랐다면, 그 순간만큼은 죽음보다 그것이 나를 더 무섭게 하는 대상이 된다. 죽음은 평소에 두려워하기보다 잊고 지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죽음을 맞닥뜨리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하루 중에, 일주일 중에, 한 달 중에, 일 년 중에 과연 몇 시간이나, 아니 몇 분이나, 아니 몇 초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살아갈까? 스스로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부터도 이 명언을 주제로 글을 쓰는 오늘 하루 중 죽음에 대해서는 단 1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은 그러할 것이다.
평생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다가 나이가 들어가고 정말 죽을 나이가 다가오면, 그제야 삶을 돌아보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도 10여 년 전에 예일대 철학 교수인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가 크게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이 삶과 죽음을 재조명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조명이 켜진 줄도 모르게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얼마의 시간을 죽음에 할애하고 있는가?’
‘나는 죽음에 대한 철학이나 가치관이 과거보다 성장했는가?’
‘나는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죽음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가 오면 죽음의 그림자를 가까이 마주하게 된다. 강렬한 그 어둠을 마주하고 스산함을 느끼게 되면 한동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죽음이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고, 언제나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든 코앞까지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우면 두려운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공유해본다. 그것은 바로 제3의 눈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메타인지 하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머릿속으로 초등학교를 떠올려보자. 단상이 있고 큰 운동장이 보인다. 이것이 내 마음인데, 하루 중에 수십 번도 넘게 운동장에 친구들이 드나든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표현되는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이 바로 그 친구들이다.
찾아오는 친구를 맞이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다가오는 친구를 운동장에서 마주 서서 맞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키 크고 덩치 큰 그 감정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단상 위에 서서 마음의 운동장에 놀러 온 친구를 제 3자의 입장이 되어 바라보는 것이다. 운동장의 단상 위는 특별한 사람만 올라갈 수 있으므로, 키 크고 덩치 큰 감정은 당신을 삼키러 다가오지 못하고,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게 된다. 반대로 당신은 높은 단상 위에서 감정을 내려다보며 당신만의 페이스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고 또 그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그저 구경하면 된다. 그 친구가 운동장을 이리저리 다니며 열심히 모래바람을 일으켜도 괜찮다. 결국 하교 시간이 되면 모든 친구가 교문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제3의 눈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메타인지 하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그 두려움을 마주 서서 맞이한다면, 거대하고 복잡한 생각과 막연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패닉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단상 위에 서서 맞이하면, 아주 강력한 두려움이라도, 결국에는 초등학교에 놀러와 운동장에 머물다 시간이 되면 교문 밖으로 나설 작은 친구 이상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제3의 눈으로 떨어져서 죽음을 자주 만나는 경험은, 앞으로 삶에서 언젠가 반드시 찾아와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죽음이라는 친구와 더 자연스럽고, 진하며, 솔직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이런 연습이 메타인지 훈련이자 마음챙김 연습이 된다.
이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죽음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해보고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2000년 전 푸블릴리우스 시루스가 주는 힌트를 가지고 오늘을 야무지게 살아간다면, 이 명언이 자신에게 한 줌의 통찰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