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문득 든 생각
이미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아침 비몽사몽간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버스가 뒤집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버스 기사님이나 같이 타고 있던 분들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다거나 특별히 반사회적 테러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냥 회사에 아프다고 전화를 하면 바쁜데 자기 관리도 못 한다고 혼날 것 같았고 그렇게 혼나면서 쉬어봐야 기껏 하루 빠질 뿐이었다. 주중에 하루 빠져봐야 그다음 날 다시 회사에 가서 욕먹을 것이 뻔했고 주말을 끼고 금요일에 아프다고 하면 꾀병인 것이 너무 뻔해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금요일은 왠지 하루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꾀병 찬스(?)를 쓰기 아까웠다.
그런데 만약 불의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나를 포함하여 크게 다치는 사람 없이 전치 3-4주 정도의 진단을 받으면 몇 주, 아니 적어도 며칠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교통사고가 나서 출근을 못 했다는데 설마 그걸로 회사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이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구체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 아니 망상이 합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당시에는 힘들었었다. 유능하신 사수님께서는 밥 아저씨 마냥 한번 보여줬으니 내가 실수 없이 일하기를 요구했고 그렇게 밀려오는 일에 허덕거리다가 실수가 생기면 혼나기 일쑤였다.
크지도 않은 조직이라 이런 애환을 함께 나눌만한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옆 파트에 있는 동기에게 푸념을 일삼을 뿐이었다. 동기를 붙잡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정말 내가 하는 일은 나랑 맞지 않는 거 같아. 아무리 월급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일이 재미가 있던지, 재미가 없으면 일하면서 인정을 받던지. 그것도 아니면 퇴근이라도 일찍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셋 중 두 개 이상이 해당되는 그런 행운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한 가지라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저 생각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저 기준을 -재미, 인정, 퇴근- 충족시키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저런 일을 맡게 되었다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인정-퇴근’은 지금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좋은 일의 기준’이다. 물론 ‘일이 재미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나름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요령이라는 것도 있을 수는 있으니까.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며 새롭게 든 생각은 당시에는 막 튀어나왔던 저 기준들의 순서가 내가 가치를 두는 우선순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재미, 그다음은 인정. 둘 다 안 되면 일찍 접고 -퇴근하고- 다른 재미를 찾아서. 이하 반복.
저 기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조직에서 비중 높은 일을 맡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른 기준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선문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언제든 툭툭 털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뭐 하러?
개인적으로 만든 또 다른 일에 대한 구분으로 ‘해야 하는 일’ / ‘할 수 있는 일’ / ‘하고 싶은 일’ 이 있다. 내가 일을 해야만 한다면 언젠가 그 일이 내가 (잘)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면 좋겠다는 원대한 꿈이 가지고 있다. -지금 하는 일은 1.5개 정도 해당되는 거 같긴 하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정 수준의 수입이 필요해서 일을 해야 하면 그게 말 그대로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평생 놀고먹으며 살만큼 자산이 있지 않아 소득이 필요하여 일을 해야 한다. 뭐가 되었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맡게 되어서 하는 일도 ‘해야 하는 일’에 해당된다. 이건 그냥 현실을 살펴보면 알기 쉽다.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할 능력이 되는 일이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출 줄은 모른다. 언젠가 배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일’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잘해야 취미 정도가 아닐까. 이것 또한 앞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현재의 모습에서 가늠이 가능하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알기 쉬운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에 비해서 ‘하고 싶은 일’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슬프게도 우리는 '좋아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을 강요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고민과 노력을 해야 한다. 애당초 일이라는 건 하기 싫은 게 정상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 경우에도 천성이 게으른지라 ‘좋은 일 = 안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받은 환경이면 모를까 기왕 해야 한다면 하고 싶은,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 하고 싶은 = 좋은 일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겠고 개인의 꾸준한 고민 끝에 깨달음이 올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AI라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해보려고 한다.
AI? 인공지능? 알파고? 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여기서 AI는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가 아닌 긍정적 탐구 또는 장점 탐구 Appreciative Inquiry 를 뜻한다. 원래 조직 역량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온 것이지만 개인에게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며 코칭에서도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AI는 과거의 성공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그 경험으로부터 긍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고 이를 현재와 연결시켜 목표하는 바를 이루도록 돕는 방법이다. 여기서 과거 경험으로부터 발견하는 것을 핵심 긍정요소 Core Positive 라고 하고 과거에서 목표까지 연결하는 프로세스를 4-D라고 하는데, 4-D는 과거의 좋았던 경험을 발견하고 Discovery 이를 꿈 꾸며 Dream 구체적으로 디자인하여 Design 실현하는 Destiny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AI를 적용해 보자면,
1. 먼저 일을 하면서 좋았던 경험을 떠올리고 - Discovery
-꼭 회사일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폭넓게 떠올려보자-
2. 그때의 좋았던 순간의 기분을 최대한 오감을 살려 생생하게 되살려 본다. - Dream
3. 당시 자신의 어떤 장점들이 그런 순간을 이루어 냈는지를 찾아보고 - Core Positive
4. 장점들을 더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 Design
5. 이런 인식과 노력들이 나침반이 되어서 자신의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하게 될 것이다. - Destiny
꼭 AI 기법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노력은 언젠가 나에게 더 알찬, 그리고 행복한 경험을 하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소위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데 지금 당장 좀 재미없는 일을 한다고 해서 앞으로의 재미를 포기하기에는 우리가 살 날이 너무 창창하니 말이다.
아, 그리고 결국 뒤집어지지 않은 버스를 매일 아침 타고 출근하던 부서에서는 떠나서 지금은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더 행복한가? 더 만족스러운가? 고민 없는 직장 생활이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좀 더 나아진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