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 현대 조각 초대전 @ 춘천MBC
삼천동 언덕 위에 위치한 회사. 평소에는 너무 조용해 새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는 곳이지만, 요즘 같은 가을철이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낮에는 소풍 온 유치원생들로, 오후에는 단체여행 오신 어르신들, 저녁이면 야경을 즐기는 연인들로 하루 종일 인산인해다.
매년 이 맘 때면 회사 앞 호반광장에서는 현대조각 초대전이 열린다. 벌써 올해로 서른 두 번째 전시라고 하니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 춘천 호반을 배경으로 조그마한 마당에 조각 작품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산책하며 둘러보기 참 좋다.
매일 출퇴근길에 조각 작품들을 보게 되는데 최근에 깨우친 것이 있다. 바로 조각 작품들이 날씨에 따라 오묘하게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어떤 날은 그림자가 졌다가, 어떤 날은 그림자가 지지 않기도 하고, 어떤 날은 작품에 햇볕이 비춰 눈이 부실 정도다. 오늘 아침엔 살짝 비가 내려서 작품들이 목욕을 한 듯 반짝였다. 날씨에 따라, 조도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보이는 조각들의 조형미는 새로운 영감을 준다.
꽃과 나무, 하늘, 호수 등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속에 인간의 창의성에 의해 만들어진 조형미가 은은하게 조화를 이룬다. 작품들은 저마다 선과 형, 색을 가지고 주변과 아름답게 어울린다. 인간들이 만드는 대부분의 조형물은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각들을 보면 자연 속에 숨은 질서와 규칙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조각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지만, 매일 보다 보니 작품들에 정이 들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면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을 형상화한 'Fly in the sky'라는 작품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위에 한 사람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아마도 전시된 작품 중에 키가 제일 큰 것 같다. 파란 가을 하늘을 향해 역동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람의 형상을 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날아오르는 기분이 든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
돌을 나무처럼 깎아 만든 세밀한 자국들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위해 10톤의 화강석을 깎고 또 깎았다고 한다.
호수가 쭉 펼쳐지는 뒷마당에는 조금 더 다양한 크기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호숫가에 다다르면 멋진 호반을 배경으로 슬픈 눈빛의 한 거인이 보인다. 살며시 벌린 팔은 누군가를 껴안아주기 위함일까. 작가는 아파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형상을 표현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돌이나 청동, 철 등을 재료로 만든 기존 조각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거대한 크기의 풍선 오브젝트에 공기를 주입한 것으로 어떤 작품보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밖에도 곳곳에 숨어있는 작품들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탐구와 통찰을 느낄 수 있다.
빠르게 지나치기만 했던 회사 앞마당에 조각이 놓인 것만으로 조금 더 회사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건 나뿐만이 아닌지, 점심시간이면 다른 동료들도 회사 마당에 나와 조각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더 나누곤 한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유현준 건축가는 소통이 단절되어 가는 현대 도시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소통의 단절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도시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회사의 벽을 허물고 조각 작품을 놓은 이곳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통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히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는지. 도시 곳곳에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TRAVEL TIP] 한국 현대조각 초대전
1987년부터 매년 가을에 춘천 MBC 광장에서 개최하는 조각전. 조각계를 대표하는 원로와 교수 등이 엄선한 작품들이 전시되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조각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평. 야외 조각전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32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춘천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산책하기 좋다. 올해(2018년) 전시는 10월 21일까지 이어진다.